하루쯤 그냥 흘려보내도 괜찮잖아. 긴 여행인데.
오늘은 좀 쉴까.
눈 뜨자마자 든 생각에 어쩐지 서글펐다. 사람은 왜 충전하는 데 하루의 삼분의 일이나 써야 하냐며 늘 불만을 토로하던, 좋은 데 와서 호텔에만 틀어 박혀 있을 거냐고 채근했던 나였는데. 이제 너무 늙어버린 걸까. 핑계 대자면 적지 않다. 이틀 전엔 크리스마스 마을 다이커 하이츠까지 4만 보를 걸었다. 아이폰의 운동 기록을 열어 보니 이동 거리만 30km란다. 어제는 좀 쉴 줄 알았건만 때마침 열린 산타콘 구경하느라 종일 맨해튼 중심가를 헤매고 다녔다. 늘 뭔가 일어나는, 도무지 잠들지 않는 도시에서 나 역시 뜬 눈으로 삼 주를 보냈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마침 창 밖 풍경이 희뿌옇길래 하루쯤 쉬어야 한다면 오늘이다 싶었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때때로 도망쳐 온 곳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아니 보통 때보다 더 근면하다.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을 감자채 치듯 잘게 썰어 이곳 저것에 나눠 쓴다. 결국 녹초가 된 그들의 말은 이렇다. “쉬고 싶어.” “돌아가면 좀 쉬어야지.” 나는 그 아이러니를 좋아한다. 그럼에도 그간 내겐 인색했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날 안 챙기면 누가 챙기겠어.’ 큰맘 먹고 하루 휴일을 주기로 정했다. 하루 방값이며 남은 날짜를 세고 있는 머리를 달랬다. 80일 중 하루쯤 그냥 흘려보내도 괜찮잖아,라고.
쉬겠다 맘먹으니 몸도 절전 모드로 전환되나 보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허드슨 베이글에서 모닝 스페셜 샌드위치를 사서 4층 계단을 오른 것만으로도 숨이 차고 기운이 쭉 빠져서 식탁 위에 빵 봉지 던져두고 곧장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으니 창문에 빗방울 부딪히는 토도독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환청이었겠지만 몇 블록 거리 타임 스퀘어의 소음들도 귓가를 맴돌았다. 간밤에 들었던 몇 발의 총성 그리고 요란한 경찰차 사이렌은 꿈이었겠지 싶은 평온함에 다시 잠이 들 뻔했다가 꾸르륵 뱃속 소리에 눈을 떴다. 간접 조명뿐인 집은 초저녁처럼 어둑어둑했다. 책상 위 맥북 화면에 떠 있는 간밤에 쓰다 만 원고, 그 옆에 놓인 밴 앤 제리스 아이스크림 통. 그 둘 말고는 스탠드며 전신 거울, 화분 하나하나 모두 집주인 소유지만 휴일의 풍경이란 건 그것을 초월하는 정겨움과 편안함이 있다. 그때만큼은 뉴욕 헬스키친이 아닌 서울 강북구에 있는 내 방에 누워 있는 기분이었으니. 갑자기 집 밖이 시끄러운 뉴욕 맨해튼이란 사실이 몹시도 신기했다.
출장 갑니다, 뉴욕으로요.
종일 집콕 하겠단 계획은 역시나 실패. 마감을 앞둔 원고며 편집 작업이 좁은 책상과 침대 위에선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맥북과 충전기 욱여넣은 가방 둘러메고 뉴욕 공립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길에 문득 떠나오기 전 내 인사말이 떠올랐다. 그동안은 늘 여행 다녀오겠다고 했던 내가 이번엔 왜 출장 간다고 했을까. 당장 생각나는 차이는 일상과의 끈이었다. 일 년 전 겨울, 석 달간의 유럽행을 앞두곤 이것저것 정리할 것들이 많았다. 진행 중이던 강좌, 꾸준히 연재하던 칼럼 하다못해 개인 블로그까지. 코로나 이후 오랜만에 떠나는 데다 한 도시에 짧으면 사나흘 머문 바쁜 여정이니 서울의 일들은 고이 접어 두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입대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비장하게 출발했나 싶다만. 일 년 뒤 뉴욕행을 앞두고는 일상과 느슨하게나마 이어져 있기로 했다. 매주 마감에 쫓겨 종종 새벽잠을 자더라도 그것 역시 전과 다르게 여행하는, 살아보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다른 곳에서 눈을 뜨는 여행과 한 도시에 쭉 머무르는 여행이 다른 것처럼. 사실 그 외에는 별 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간의 여행들 속에도 짧아서 잘 보이지 않았을 뿐 일상의 풍경들이 있었으니까. 뉴욕에선 시간이 길어진 만큼 그것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보였을 뿐. 관광객처럼 환호한 날이 있었는가 하면 어떤 날엔 오랜 여행자처럼 무표정으로 응시하기도 했다. 또 다른 날엔 연신 시계를 보며 출장 나온 회사원처럼 일했다. 출장을 간다는 내 인사말엔 그런 뜻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곳에서도 여전히 당신과 연결돼 있다고, 우리의 일상을 살 생각이라고. 그러니 다녀와서 보자는 말은 필요 없다고.
기대보다 훨씬 근사한 도서관에서 이번 주 해야 할 편집 작업이 끝났다. 덕분에 남은 두 달간 햄버거만큼은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단 생각에 기쁘다가도 한편으로 왜 진작 출장이라고 하지 않았는지 후회가 됐다. 휴일이지만 집에 가는 길에 있는 타임 스퀘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한 구석 차지하고 앉아 한참 사람 구경을 했다. 언제 와도 눈부신 빛, 시끄러운 소음 사이에 있으니 아침마다 창 밖 날씨 보며 때때로 발 동동 구르던 게 생각났다. 맘 급한 여행자라야 궂은 날씨 원망스럽지 느긋한 일상에서는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어서. 게다가 어둠 깔리면 공평하게 까만 밤 아니던가. 게다가 비 그친 직후의 축축한 공기가 그날따라 긴 갈증 뒤의 물 한 모금처럼 달콤했다. 이래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시간을 충전에 써야 하는구나, 쉬러 와서도 쉬어야 하는구나. 나는 이걸 이제야 알게 됐구나.
그건 그렇고 언제 또 거기까지 가냐.
사랑에 빠지는 동시에 이별을 떠올리는, 떠나는 순간부터 돌아 올 날을 바라보는 내가 다시 서울로 돌아갈 생각에 아찔해졌다니. 며칠이나 됐다고 이제 여기가 일상이 됐나 보다. 2023년 12월의 맨해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