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요일 Aug 27. 2015

#6 해거름, 걸음이 잠시 멈추는 시간

일만 가지 노을에 깃든 백만 가지 감정


걸음이 점점 빨라집니다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니까요

저 멀리 보입니다. 반가운 맘에 가쁜 숨 참아가며 달려가는데 어째 조금도 가까워지는 것 같지 않습니다. 매초마다 조금씩 붉어지는 얼굴이 꼭 곧 등을 돌릴 것만 같고, 지금이 아니면 다시 못 볼 것 같아 걸음을 재촉하지만 결국 오늘도 허탕이네요. 걸음을 멈추고 남은 숨을 몰아쉬며 뒷모습이라도 담을까 싶어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처럼 아쉬운 걸음을 한 이가 한둘이 아니네요. 오늘도 이렇게 아쉬운 해거름이 저뭅니다.



여러분 가슴속의 하늘은 어떤 색인가요?


풍덩 뛰어들고픈 진한 파랑, 반가운 첫눈에 올려다본 머리 위 새하얀 하양 아니면 내 한숨과 투정쯤 아무도 못 보게 가만히 가려주는 깊은 검정? 제 안의 하늘은 바로 이 '해거름'의 색입니다. 언뜻 보기에 전부 다른 색 같지만 유심히 보면 결국 같아요.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하늘'색이니까요.


천천히 오는 걸음처럼 하늘은 서서히 붉어지고, 아쉽게 돌아선 걸음처럼 하루가 점점 멀어집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거름이란 말이 걸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재미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만난 수천 개의 해거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빠르면 다섯 시, 늦을 때는  여덟아홉 시

또 하나의 하루와 만나는 시간

비현실 같았던 그 날의 해거름, 서울

하루에 꼭 한 번입니다. 그럼 매일 거저 볼 수 있는, 한없이 흔한 것 아니냐 하지만 생각해보면 하나하나가 모두 '새것'입니다. 그 날과 꼭 같은 새파란 하늘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심심찮게 듣는데, 눈물 나게 감동적이었던 그 노을과 재회했다는 이는 아직 만난 적이 없거든요.


잠시 꽃이 피듯 화려했다가 금세 어두워지는 풍경. 누군가는 이 순간이 하루의 마무리라고 하지만, 이 시간을 사랑하는 저는 그 자체로 아주 짧은 하루라고 답합니다. 그래서 화창한 오후를 다 보내고 날이 저물때쯤에야 어슬렁 나설 때가 많습니다. 오늘은 어떤 기적과 마주할까 기대하면서요.



누구나  가슴속에 멋진 석양을 배경으로 한 추억이 수십 개 정도는 있습니다. 다른 이의 눈으로 담은 멋진 노을을 감탄하며 바라본 경험은 그보다 더 많을 테고요. 마치 비현실처럼 하루 속에 반짝하고 빛났다가 사라지며 하루 종일 단단히 가둬두었던 감정의 벽을 허물죠. 모두를 무방비 상태로 만듭니다. 과묵한 그가 본인도 모르는 감탄소리를 내고 나란히 앉은 그녀의 재잘거림은 한결 빠르고 경쾌해지죠.


게다가 손쉽게 '그럴듯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야경 촬영처럼 삼각대나 릴리즈 같은 생소하고 어려운 것들이 필요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 보관함에는 유독 노을 사진이 많습니다. 매일 지나는 집 앞 공원부터 일부러 찾아간 바닷가, 언제 다시 갈지 모를 바다 건너 도시까지 배경도 참 다양합니다. 같은 배경, 같은 구도의 사진도 많은데 어느 한 장 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함께 본 첫 노을, 서울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의 생활은 이 절정의 순간을 비켜가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투명함을 핑계로 지하실보다 더 굳게 우릴 가두는 사무실 창문을 통해 시선 한 번 흘겨 보내고

때로는 퇴근길 버스나 지하철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지나쳐버립니다.

그마저도 보지 못하고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날이 부지기수죠.

석양이 깔리는 그 짧은 시간조차 우리는 마음대로 쓰기가 영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멍하니 석양과 마주할 때면 괜히 더 감상에 빠지게 되죠.  일부러라도 아무생각 하지 않으려 합니다.


다행히 오늘 석양은 유난히 더 아름답네요.

이럴 때 가방이고 주머니에 사진기가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가을의 시작을 알린 그 날의 노을, 한강


어떤 장면을 간직하고 있나요?

하루의 모든 색을 보여준 그 날의 해거름, 제주

가장 기억에 남는 노을을 꼽아봅니다. 역시나 '노을을 찾아 떠난' 날의 풍경보다는 우연히 펼쳐진 기적 같은 장면을 떠올리게 되네요. 제주에서 만난 그 날의 해거름은  그중 가장 놀라웠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제주 곳곳을 돌아다니던 날, 수많은 기억들이 마치 한 장소처럼 섞여 혼란스러울 때쯤 차창으로 수백 가지 색이 스며들었습니다. 차를 세우고 내린 곳에서 본 그 한 컷에 이 날 하루의 모든 색이 담겨있었습니다.


아직은 차가운 저녁 봄공기에 심호흡을 내쉰 그 순간부터 제 손마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날의 해거름을 오롯이 제 가슴에 담았습니다. 지금도 이 사진을 보면 그 날의 설렘을 그대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한참 동안 걸음을 멈추고 호흡마저 종종 참아가며 열심히 새긴만큼, 누구에게나 그 순간들은 저마다의 의미를 가집니다. 제 보관함 속 비슷비슷한 노을 사진들을 쉽게 버릴 수 없는 이유도 사진 하나 하나에 깃든 추억들을 모두 떠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전거를 멈춰 세우게 했던 풍경, 서울



주변을 둘러보세요

이미 기적이 골고루 내려 앉았습니다.


어느새 이만큼 어두워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알아채는 순간, 마치 옷을 갈아입다 들킨 사람처럼 풍경은 황급히 남은 색을 입습니다. 빠르게 지나는 그동안 하늘과 풍경만 바라보기에도 시간이 빠듯하지만 큰 맘 먹고 주변을 둘러보면 또 다른 기적들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마치 평생 오늘만을 기다렸다는 듯 이 석양을 만끽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는 그들의 표정은 밤이 오지 않을 것처럼 환하고 혼자 있는 이 역시 그런대로 멋스럽습니다. 마치 하늘에 있던 빛이 땅 위의 사람들에게 내려앉은듯 눈부십니다.


하늘이 붉어질수록 땅과 그 위의 모든 것은 색을 잃습니다. 마치 석양이 땅의 색을 빨아들이는 듯, 색을 빼앗긴 남은 땅 위의 것들은 실루엣만 앙상하게 남죠. 그런데 그 움직임이 꽤나 솔직해서 좋습니다. 화려한 배경 위의 담백한 실루엣을 담는 즐거움 역시 이 시간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것이죠. 이 시간이 만드는 투박한 그림들이 때로는 주인공보다 더 돋보입니다.




걸음을 멈춥니다, 꽤나 오래.

가슴은 오히려 더 빠르게 뜁니다.


아무리 걷는 게 좋은 사람도 이 순간만큼은 잠시 걸음을 멈춥니다. 심지어 앉고 기댈 자리를 찾기도 하죠.

무엇이 그리 매력적일까 싶다가도 눈 앞에 펼쳐진 오늘 몫의 '기적'을 보고 있으면 이내 배시시 웃게됩니다. 그 감흥이 너무 커서, 때로는 한 장소에서 하루를 훌렁 보내버릴 정도라지요.


해거름은 걸음을 멈춰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장면은 시간이 만들어줄 테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곳에 서 있는 것뿐이죠. 걸음을 잠시 멈추고, 가만히.


눈을 깜빡일 때마다 변하는 장면에 한 자리에서 찍은 사진만 해도 수백 장입니다. 그런데도 쉬이 질리지 않아 자리옮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연신 셔터를 누릅니다. 사진들을 본 그는 왜 같은 사진들이 이렇게 많냐고 묻지만 제 눈에는 하나하나가 다 다른 이야기입니다. 거짓말 좀 보태면 수십일은 머물다 온 것처럼 많은 감정들이 남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비로소 이 기적이 내 몫이 되었습니다






이제 곧 새로운 해거름을 맞을 시간입니다.

오늘의 석양은 꼭 먼저 마중 나가 맞이해보세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여러분의 몫으로 주어진 오늘의 '기적' 말이에요.



매거진의 이전글 #5 우리의 사진, 기꺼이 더 실패해주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