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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바스 Sep 13. 2022

러시아 짠돌이가 먹는 소시지

800원짜리 러시아 소시지 후속 편

1년여 만에 드디어 내 방에도 룸메이트가 배정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껏 다양한 외국인 룸메이트를 만나봤지만 예민한 나와 잘 맞는 룸메이트는 손에 꼽았기에 좋은 룸메이트가 배정되길 간절히 바랐다. 당장은 방을 혼자 쓰고 있기에 우리 문화에 맞춰 방바닥을 맨발로 다닐 수 있게 청소를 해놓았다. 피곤해도 하루에 한 번은 꼭 바닥 청소를 할 정도로 깨끗이 사용했다. 작은 공간을 마음껏 누리던 나에게 룸메가 배정된다는 사실이 너무도 불편했다. 룸메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 온다고 한들 내가 먼저 양보하고 배려해야지 평화가 온다는 사실이 가장 나를 불편하게 했다. 이런 고민조차 부담스러웠지만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만큼 룸메와 잘 지내볼 수밖에 없다.


수업을 마친 뒤 밤 10시가 되어 기숙사에 와보니 방에 불이 켜있었다. 방으로 다가가는 발걸음이 부담스러웠다. 하루 종일 '도대체 룸메로 누가 올까?'라는 고민에 빠져 수업도 제대로 못하고 피곤했다. 신경은 곤두서서 고슴도치처럼 예민해 있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방문 손잡이를 힘차게 열자 침대에 앉아있는 한 동양인이 누워 있었다. 1초도 안 되는 잠깐 사이 눈으로 누워있는 동양인을 스캔했다. '한국인인가? 설마 중국? 일본?'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니 오*기 3분 짜장이 꺼내져 있는 것을 보고 조심스레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도 반가웠다. 같은 말과 문화를 공유한다는 것은 타지에서 정말 큰 힘이 된다. 룸메이트 형은 나보다 3살 많았고 체격도 다부졌다. 지금까지 해병대 간부로써 생활하며 학자금을 모아 유학을 왔다고 했다. 매달 받는 군인 월급의 70~80%를 저축해가며 생활했고 러시아에 오기 전까지 힘든 알바를 하며 돈을 모았다고 했다. 간부 생활을 마친 뒤 러시아에 오기 전까지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연기를 배우고 생활했던 형의 이야기는 눈물겨웠다. 


해병대 간부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엄격하고 무서울 것 같았지만 룸메 형은 순수하고 털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룸메 형과 나는 이야기도 잘 통했고 눈빛으로 서로를 이해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렇게 얼마 안 되어 우리는 둘도 없는 단짝이 됐다. 무엇보다 형과 나의 짠돌이 경제관념이 통했다. 유학생활은 '무조건! 어떻게든! 아낀다!'라는 다짐으로 일치하여 가치관까지 거의 하나가 됐다. 


룸메형과 나의 주된 걱정거리는 생활비였기에 서로서로 도와가며 싼 식료품과 생필품이 있으면 그때그때 서로에게 전화를 했고 필요하면 대신 사다주기도 했다. 그렇게 고기를 자주 먹지 못했던 우리는 고기 대신 먹을 수 있는 값싼 소시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결국 집 근처 마트에서 40루블 짜리(당시 한화 800원) 러시아 소시지를 발견했다. 그 즉시 형에게 전화하여 지금껏 발견했던 소시지 중에서 가장 싼 것을 발견했다고 이야기했다. 마치 전쟁이라도 터진 것인 마냥 무전기를 잡고 형에게 보고하듯이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 40루블 짜리(당시 한화 800원) 소시지의 의미는 생존이었다. 눈으로 판단했을 때는 맛과 품질 모두 합격이었다. 포장된 껍질도 무난했고 무엇보다 경제적 기준에 아주 적합한 소시지라 판단됐다. 당장 기숙사로 달려가 룸메 형에게 보여주고 하나는 기름에 굽고 또 하나는 삶았다.


소시지를 두 눈으로 확인한 룸메 형도 그 길로 소시지를 사러 나갔다. 형이 잠깐 나간 사이 서둘러 밥을 차렸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소시지를 집어 들었다. 그 한입 베어 먹어보니 형편없는 맛이었다. 한국에서 흔히 먹었던 분홍 소시지와 비슷한 것 같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맛을 가지고 있었다. 소시지 맛이 나기보다는 짭짤한 밀가루 막대기 같은 맛이었다. 급한 대로 소시지를 살려보고자 카레로도 만들어 먹어 봤지만 역시나 맛은 형편없었다. 


그런데 룸메 형은 소시지를 2팩이나 사 왔다. 싱글벙글한 형은 나에게 연거푸 고맙다며 나중에 자신이 한국에서 가저온 음식으로 몸보신 하자며 매우 고마워했다. 그런 룸메 형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차마 소시지의 맛이 형편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룸메 형은 40루블 짜리 소시지로 저녁을 준비했다. 감자, 양파, 당근을 썰어 소시지와 볶아 케첩을 뿌려 소시지 야채 볶음을 했다. 자세히 보니 소시지 볶음에 케쳡을 너무 많이 넣어 온전한 소시지의 맛을 느끼기는 어려워 보였다. 맛없는 소시지를 바로 눈치 못 챌 수도 있게 다는 생각에 일단 형의 반응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형은 소시지 야채볶음이 담긴 프라이팬째 들고 와 상위에 놓고 밥 한 공기를 퍼와 상에 앉았다. 밥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더니 큰 나무 숟가락으로 야채와 소시지를 퍼 먹었다. 형의 먹는 모습에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이 떨렸다. '혹시라도 나한테 화내면 어쩌지?' 해코지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조용히 지켜봤다. 그런데 형 반응이 놀라웠다. 박수를 치며 너무 맛있다고 함박웃음을 지어 나에게 감사를 표했고 소시지 맛도 훌륭하다며 만족에 만족을 거듭했다. 거기다 앞으로 이 800원짜리 소시지를 주양식으로 삼을 것이라 선포했다. 형을 보며 나는 '원효대사의 말이 지금도 이뤄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알기론 룸메 형은 학교를 졸업하기까지 5년 동안 이 소시지만을 먹었다. 신기하게도 5년 동안 소시지의 가격이 변하지 않았는 점도 놀라웠다. 배신하지 않는 룸메 형의 마음을 소시지 회사도 알아준 걸까? 형도 절대로 다른 소시지를 결코 사 오지 않았다. 나는 가끔 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기와 닭을 사 와 고기도 구워주고 삼계탕도 해주며 형에게 종종 대접했다. 그렇게 라도 내가 형에게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이후로 나는 800원짜리 러시아 소시지를 두 번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귀중하고 맛있는 음식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역시 사람은 마음먹기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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