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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가장 쓴 커피를 맛보다

러시아에서 에스프레소를 처음 마셔 봤습니다.

by 크바스

고등학교 시절부터 커피를 좋아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가끔은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때로는 혼자 사색에 잠기며 편의점에 들러 커피를 사 먹었다. 편의점 커피는 종류도 다양해서 고르는 재미가 있었고, 그중에서도 씁쓸하면서 담백한 맛이 나는 커피가 특히 좋았다.


달달한 커피를 마실 때면 입안에 퍼지는 단맛이 기분을 한껏 들뜨게 했다. 마치 어른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작은 사치 같았다. 하지만 커피를 좋아한다고 해서 커피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커피의 종류라고 해봤자 손에 익은 믹스커피나 편의점 커피 정도였다. 커피에 대한 지식은 부족했지만, 한 잔의 커피가 주는 즐거움만큼은 누구 못지않았다.


i.jpeg 러시아에서 살았다면 누구나 알고 있는 대표 카페 '꼬뻬하우즈

어학연수 시절,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의 교류는 즐거움 그 자체였다. 중국, 대만, 스페인, 루마니아, 오스트리아 등 출신도 다양했고, 나이 차이도 많게는 10살 이상 나는 형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우린 어색함 없이 동갑내기 친구처럼 지냈다.


특히 유럽 친구들은 수업이 끝난 후 근처 Bar나 카페로 자연스럽게 모였다. 커피 한 잔이나 맥주 한잔을 마시며 여유로운 오후를 즐겼다. 각자 원하는 음료나 음식을 주문하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그들에겐 익숙해 보였다.


하지만 나에겐 그런 시간이 다소 부담스러웠다. 생활비에 여유가 없던 터라, 메뉴를 고르는 순간은 항상 긴장되었다. 짠돌이 기질이 강했던 내게 카페에서 커피를 사 마시는 건 사치였다. 머릿속으로 "이 비용이면 얼마나 아낄 수 있을까"를 계산하며, 단순한 주문 하나도 신중히 생각해야 했다.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러시아의 카페 '코페하우즈(Кофехауз)'에 갔다. 메뉴판을 보며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가장 저렴한 음료, 에스프레소였다. 에스프레소가 어떤 맛인지, 어떤 느낌인지 전혀 몰랐지만, 선택의 폭은 좁았고 그저 가격만을 기준으로 주문을 결정했다.


“에스프레소, 주세요.”


주문을 마친 후, 주변 친구들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들은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멋지다!”라고 외쳤다. 순간 당황했지만, 나 역시 여유롭게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리며 친구들의 반응에 맞춰 웃었다.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과연 에스프레소가 어떤 경험을 선사할지, 그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82192969.jpeg 꼬뻬하우즈 메뉴


에스프레소는 예상보다 훨씬 작은 잔에 담겨 나왔다. 잔을 본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다. 무려 70루블 가까이 되는 커피인데, 양은 한 모금도 채 되지 않아 보였다. 친구들과 카페에 가면 보통 한 시간 이상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를 즐기곤 했는데, 이 에스프레소는 10초 만에 다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에스프레소 옆에는 아주 작은 동그란 초콜릿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초콜릿이 어떤 의미인지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잔을 들어 첫 모금을 마신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너무 뜨겁고 쓰디써서 내 얼굴은 본능적으로 인상을 팍 쓰게 됐다. 하지만 친구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그들을 따라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잔을 내려놓았지만, 속으로는 ‘이걸 대체 어떻게 다 마시나’라는 생각뿐이었다.


친구들이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이유와 웃었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됐다.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건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행위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선 유럽 특유의 여유와 씁쓸한 농담을 함께 삼키는 문화적 경험이었다. 그날, 나는 그들의 문화와 취향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에스프레소의 쓴맛과 함께 작게나마 삶의 새로운 단면을 배웠다.


마시면 마실수록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어릴 적 억지로 삼키던 한약 녹용부터, 맹장 수술 후 처방받았던 쓰디쓴 가루약까지. 이 작은 잔이 나를 추억 여행으로 데려가는 듯했다. 그래도 돈이 아까워 한 모금씩 홀짝이며 적응하려 애썼지만, 적응은커녕 고문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짠돌이 정신에 커피를 남기기는 너무 아까워 결국 다 마셨다. 마지막 한 모금까지 삼키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되뇌었다.


"쓴맛에 적응하자. 그래도 이렇게라도 아끼는거야"


그러나 에스프레소의 여운은 몸으로 이어졌다. 그날 하루 종일 심장은 두근거리고, 밤에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학교에 갔다. 그렇게 내 유학생활의 첫 커피는 에스프레소로 시작되었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조차 사치처럼 느껴지던 그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카페에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선택지는 하나였다. 가격이 가장 저렴한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는 것. 처음엔 고통스러웠지만, 어학연수 기간 내내 카페에 갈 때면 늘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쓰니까 더 어른스러운 맛"이라고 애써 의미를 부여하며, 매번 에스프레소를 마시던 그 시간이 유학생활속 소소한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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