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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바스 Nov 25. 2024

첫 러시아 통역은 때타올

러시아에 온 지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곳에서 먹을 것만 생각하며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는데 이제는 종종 혼자 영화도 보러 갈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최근에는 러시아 문화와 음식도 즐기게 됐다. 가끔 기분 내며 런치 세트로 블린을 사먹기도 하고 샤실릭과 샤우르마도 종종 사 먹었다.


러시아 유학생으로 살아가면서 좋은 점 중 하나를 꼽자면 학생증이다. 학생증만 있으면 박물관과 극장을 무료로 혹은 싼 값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덕분에 높은 수준의 러시아 연극, 오케스트라, 발레, 미술, 박물관 등 예술을 무한정 누릴 수 있었다. 러시아를 누리고 더 깊이 알게 되니 러시아를 제2의 조국으로 생각할 정도로 러시아를 사랑하게 됐다.


가끔 강의가 취소되는 잠깐의 시간이 생길 때면 대부분 산책하러 나갔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산책길은 학교 근처에 위치한 러시아 여류 시인 아흐마또바의 생가 공원이었다. 공원은 작았지만, 너무 아름다웠다. 100년 이상 된 나무들이 그녀의 정원에 가득했고 4면이 건물로 덮여 있지만 하늘은 뚫려있어 중간중간 가끔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이 매우 좋았다. 공원 모서리 쪽에 마련된 벤치는 늘 내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러시아 문학에 취해 몇 시간이고 책을 읽곤 했다. 러시아 문학을 원문으로 읽어도 해석이 가능했다. 러시아어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붙었다. 


내 러시아어 능력을 활용해 통역도 해보고 싶었다. 일상 소통과 통역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단어 선별, 상황과 제품에 알맞은 언어적 재능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도 4년 정도의 러시아 실력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보통 러시아에서 통역 일은 비즈니스 및 외교, 정치를 목적으로 공식적인 자리가 대부분이었기에 반드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영사관과 코트라


러시아 통역원 대부분은 KOTRA와 영사관을 통해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KOTRA에서는 경제 무역과 관련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 러시아 통역원을 가끔 모집하고 있었다. 통역비는 하루 근무를 기준으로 200$를 현찰로 지급했다. 한 달에 한 번 통역을 맡아 진행한다면 내 한 달 생활비 절반을 버는 셈이다.


KOTRA에 통역 지원 서류를 접수했다. 며칠 후 면접과 언어 테스트를 진행하기 위한 일정이 잡혔다. 다양한 기업의 대표와 임직원을 상대해야 하는 업무였기에 반드시 테스트를 거쳐 선발된 인원만 통역원으로 활동할 수 있다고 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특별한 준비 없이 면접과 테스트를 보러 갔다(사실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준비를 못했다).


면접관은 KOTRA에서 근무하고 있는 세르게이라는 남자 직원이었다. 나이는 40대 중후반쯤 되어 보였다. 세르게이는 나에게 자기소개와 러시아에 온 이유, 어떤 대학교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지 자세히 물었다. 생각보다 특별히 어렵거나 부담되는 질문은 없었다. 세르게이는 KOTRA에서 진행되는 사업과 통역 업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줬다.


감사하게도 KOTRA 면접에 합격했다. 한 달 평균 2회 정도 통역 업무가 있으며, 가장 언어를 잘하는 사람부터 차례대로 업무에 배정된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나에게도 첫 번째 통역 임무가 주어졌다. 국내 중소기업과 러시아 기업 간의 무역 컨퍼런스에서 어느 국내 중소기업 통역을 맡게 될 것이라고 했다. 


첫 통역인 만큼 완벽하게 잘 해내고 싶었다. 이메일을 통해 내가 배정된 회사 소개서를 받았다. 100가지도 넘는 다양한 물품을 해외로 유통하고 있는 작은 무역 회사였다. 회사소개서와 물품들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하고 통역을 준비하면서 예상되는 단어와 숙어를 정리해 A4용지에 기록했다. 기록하다 보니 A4용지 4장에 가득 채웠다. 


이 호텔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 정확하게 이런 식으로 진행 됐다.(출처 코트라 무역관)

무역 컨퍼런스는 센 나야 광장에 있는 어느 좋은 호텔에서 열렸다. 호텔 1층 로비의 큰 룸을 빌려 국내기업들의 부스를 설치했다. 부스는 총 10개가량 되었다. 그중 내가 담당할 무역회사는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 부스에는 60대 중반의 한 이사님께서 앉아 계셨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오늘 통역과 관련된 회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사님께서는 고무장갑, 수세미, 때타월을 주력으로 러시아 시장에 진출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에게는 대충 제품 좋다는 것만 이야기해 주면 된다고 했다. 이사님께서도 상품을 직접 제조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제품에 특징이나 장점은 잘 모르신다고 했다. 




때타월을 어떻게 러시아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할까? '때'라는 단어 앞에 말문이 막혔다. 생전 입에 담아보지도 못한 단어이기도 하고 생각도 못 한 내용이라 난감했다. 고민 끝에 난 '더러움(그랴즈)'라는 명사의 단어를 선택해 통역하기로 했다. 말에 뉘앙스만 잘 담아서 살리면 '때'라는 느낌이 날 것 같았다.


때타월은 탁자 위에 전시되어 있었다. 거기에 더해 다양한 수세미에 전시를 해놨다. 스스로 머리를 굴리며 제품의 장점을 어떻게 부각할지 키워드로 정리해 봤다.


1. 모두 한국에서 제조된 제품이다. (생각보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한국 제품 인식이 좋다)

2. 때타월은 기존에 쓰는 목욕 타월과는 다르다. (거친 면으로 몸을 닦으면 시원하다)

3. 중국제품과 비교해 봐도 퀄리티를 확보하고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물건을 팔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사님께서 계속 말을 거셨다. 업무적인 내용이 아닌 자기 근육 자랑과 여행기, 재산을 세밀하게 자랑하셨다. 그리고 무역 콘퍼런스를 빨리 끝내고 러시아 여자들이 있는 술집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여자들이 있는 술집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통역 준비에 날이 서 있어 정중하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통역 준비에만 몰두했다. 그럼에도 이사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사진을 보여 주며 러시아 고객이 오기 전까지 몸매 자랑하셨다. 통역 준비에 예민해진 탓에 화가 치밀었다. 꾹꾹 감정을 눌러가며 그럼에도 잘 해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러시아 손님들을 맞이했다. 나에게는 통역으로서 첫 무대가 아닌가? 완벽하게 첫 통역을 완수하고 싶었다. 러시아 구매자가 가고 난 뒤 이사님께서는 핸드폰을 열어 자기 근육이 얼마나 대단한지 설명하셨다. 거기다 이사님의 손님 응대는 대충대충 진행됐다.


"그냥 좋다고 하고. 한국에서 만들어진 제품이니까 Made in Korea. 이거 말씀드려"


그래도 이왕 잘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러시아 바이어 들에게 제품의 특징을 설명했다. 생각보다 러시아 바이어들의 질문도 날카로웠고 거기에 맞는 대답을 찾아서 하는 것이 어려웠다. 통역을 하다 보니 제품의 특징뿐만 아니라 무역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오갔다. 보통 선박 컨테이너를 통해 거래가 진행된다고 하는데, 무역에 대한 개념이 없어 통역하는 데 어려운 점이 많았다. 처음 접하는 무역 개념과 용어들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러시아 기업이 한국 기업에 관심을 가지고 방문했다. 러시아의 대기업 가즈프롬도 왔다. 거기다 내가 자주 가고 좋아하는 러시아 초대형 마트를 운영하는 관계자들도 방문했다. 그들은 우리 제품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고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했다.


러시아 관계자 : 굉장히 흥미로운 제품이네요. 한국에서는 이 제품을 많이 사용하나요? 이걸로 몸을 닦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이사님 : 아이거~ 때가 쫙쫙 밀려요. 쫙쫙~ 그리고 내구성도 좋아서 오래 쓸 수 있고. 이거 봐요, 당겨도 끊어지지도 않아요. (그리고 팔 근육을 보여준다)

나 : ...^^  


이사님의 재치 있는 행동 덕분인지 메일을 통해 보다 자세한 유통 방안과 가격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때타월과 고무장갑이 내가 자주 애용하는 러시아 대형 마트에 유통되길 바라는 마음에 적극적으로 통역했다.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하루가 끝났다. 아침 8시부터 대기하다가 오후 6시가 다 되어 끝났다. 이사님은 계속 나와 같이 술집에 가자고 했지만 계속 거절했다. 나는 어차피 술도 끊었던 터였고 가봤자 이사님의 뒤치다꺼리나 할 생각에 빠르게 도망치고 싶었다.


통역을 마치고 뒤늦게 알았는데 KOTRA에서는 이번 행사에 참여한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 했다. KOTRA에서 제공된 서비스와 통역원의 수준 및 능력에 대한 체크 항목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이사님께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통역하면서 중간중간 욱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감정에 치우쳐 행동하지 않아 돌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다행히 평가는 통과했다고 전해 들었다. 이번 평가에서 문제가 되었다면 이번 통역이 처음이자 마지막 통역원으로 활동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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