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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핀란드 친구에게 냉장고 사기

우리 친구인데 조금만 싸게 팔아줄수 없을까?

by 크바스

냉장고가 없는 삶이 얼마나 불편한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음식을 미리 사둘 수도 없고, 보관이 불가능하니 금방 상해버린다. 러시아에 와서 냉장고 없는 삶을 처음 겪으면서, 냉장고라는 물건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됐다.


냉장고를 대체할 무언가를 찾아보려 했지만, 그 역할을 완전히 대신할 물건은 세상에 없었다. 돈을 아끼겠다고 냉장고를 안 사는 건 어리석은 선택일까? 하지만 지금 가진 생활비로는 냉장고를 구매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어쨌든, 냉장고 없이 살아갈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보기로 했다.


첫 번째, 이중 창문 사이 공간 활용하기. 우리 기숙사의 창문은 소련 시대에 제작된 나무 이중 창문이다. 두 창문 사이에는 약 20cm 정도 되는 틈이 있다. 그 공간을 이용해 야채와 과일을 보관했다. 수은 온도계를 사용해 틈 사이 온도를 확인해 보니 대략 7~8도 정도 나왔다. 급한 대로 다양한 야채와 과일 반찬을 창문 틈 사이에 하나씩 쌓아 보관해 두었다.



9JK3aOtkO2KOl855LJMGNebfrHVmXGFLVpxWJJ5JJVEjqddnALHayyplGMGtL6EzqSTD_MAFfMpEKVVVU6iCfYmA.jpg 정확하게 이런 모양의 창문이었다. 소련시대 가정집에 정형화된 창문이었다. 이중창형태로 되어있고 그 사이에 음식을 가득 채워 넣었다.


그런데 우스꽝스러운 문제가 있었다. 창문에 음식을 너무 많이 쌓아두다 보니 밖에서 그 모습이 전부 보였다는 것이다. 내 방 창문은 버스정류장과 작은 공원을 마주하고 있는데, 오래된 창문이라 유리도 맑고 투명해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커튼을 치지 않으면 방 안은 물론, 창문 틈 사이에 보관해 둔 음식들까지 그대로 노출되었다.


내 방은 2층이라 높지도 않아, 회색빛 기숙사 건물을 바라보면 내 창문만 유독 눈에 띄었다. 창문이 알록달록해 보였기 때문이다. 사과, 바나나, 양배추, 파프리카, 소시지, 콜라 등 다양한 색깔이 창문을 통해 비쳤고, 심지어 소시지 상표까지 뚜렷이 보였다. 학교에 갈 때나 집에 돌아올 때 창문을 볼 때마다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둘째로, 같은 기숙사 친구에게 냉장고 부탁하기. 몇번 중요한 식재료를 맡겨 봤지만 불편했다. 요리할때마다 찾으러 가야했고 이성 친구 였기에 늦은밤 혹은 아침일찍 찾아가 냉장고를 매번 부탁 하는것은 무리 였다. 한번은 생닭은 샀는데 친구 냉동실에 보관을 부탁했다. 친구에게 생닭 맡겼던걸 까먹는 바람에 먹지도 못하고 친구가 버린적도 있다.


둘째로, 같은 기숙사 친구에게 냉장고를 부탁하기. 몇 번 중요한 식재료를 맡겨 봤지만, 이 방법도 여러모로 불편했다. 요리할 때마다 식재료를 찾으러 가야 했고, 특히 그 친구가 이성이다 보니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에 냉장고를 부탁하는 건 부담스러웠다.


한 번은 생닭을 친구의 냉동실에 맡겼다가 깜빡 잊어버린 적이 있다. 결국 그 생닭은 유통기한이 지난 줄 알고 친구가 버리고 말았다. 그 일을 계기로 자꾸 냉장고를 부탁하는 것이 더 미안해졌다. 결국 냉장고를 새로 구매하기로 결심했다.


ed03d91b89650e8fef69c3a041921cf1.jpg 내가 구매해서 썼던 소련시대 냉장고 모델과 비슷하다
как-перевесить-двери-холодильника.jpg 내부는 이 사진과 동일했다. 추가로 온도 조절 기능은 고장나 있었다.


사실 냉장고는 한 번 구매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방을 옮기게 되면서, 그동안 사용하던 소련식 냉장고를 룸메이트 형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형의 가정형편이 어려운 걸 알았기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름 쿨한 척하며 넘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 냉장고는 기숙사 광고 게시판을 통해 러시아 친구에게 500루블(약 2만 원)에 구입한 것이었다. 40~50년 된 소련식 냉장고였지만, 정상적으로 잘 작동했다. 이 가격에 냉장고를 구한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었다. 다만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온도 조절기는 고장 나 있었지만 적정 온도를 유지했고, 내부를 아무리 닦아도 특유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위생적으로 찝찝해서 완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당시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이미 넘긴 냉장고를 후회해서 어쩌겠나? 다시 새로운 냉장고를 구매하기 위해 가장 저렴한 러시아 전자 마트에 방문했다. 호텔 미니바 크기의 냉장고가 기본 5,000루블(약 20만 원)부터 시작했다. 크기가 너무 작아서 반찬 몇가지 보관도 못하겠지만 터키에서 제조된 제품으로 나름 괜찮아 보였지만, 문제는 배송비였다. 기본 배송비가 1,000루블 정도 들었고, 제품 배송도 한 달 후에나 가능하다고 했다.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제품들은 7,000~8,000루블 정도로 가격이 높아 부담스러웠다. 한 달 생활비가 10,000루블(약 40만 원)인 상황에서 한 달 동안 아껴 쓰려는 생각이었지만, 배송비까지 더하면 냉장고 가격이 10,000루블에 육박해 결국 구매가 불가능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형 마트와 전자 마트를 모두 돌아봤지만, 배송비 포함 5,000루블대의 냉장고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다시 중고 냉장고를 찾아 구매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가장 친한 핀란드 친구 릴리야를 통해 프레드릭이라는 친구를 소개받았다. 그는 20대 후반의 핀란드 사람으로, 유명 교수님의 배우과 소속이었다. 키는 거의 190cm에 달했고, 모델처럼 잘생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같은 기숙사에 살면서 가볍게 인사만 나누던 사이였는데, 릴리야 덕분에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릴리야는 저녁마다 나를 자주 초대해 주었다. 핀란드에서 보내온 빵과 치즈가 있거나 핀란드식 음식을 준비했을 때, 맛있는 무언가가 생기면 꼭 함께 먹자며 불러줬다.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정말 고마웠다. 저녁 자리에는 프레드릭도 거의 항상 함께했다. 그는 과묵한 편이라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세 명이 옹기종기 앉아 밥을 먹으며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점점 더 친해질 수 있었다.


z_3244f5c4.jpg 프래드릭도 있고 나도있다. 사진은 민망하니 최대한 작게..

프레드릭은 다섯 남매 중 셋째였다. 릴리야와는 달리 씀씀이가 크고, 먹는 것과 입는 것에 돈을 아끼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워 보였지만, 그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바로 힘든 학교생활로 인해 지쳐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이어지는 반복된 수업 속에서 녹초가 되어 있었다. 머리를 감을 힘조차 없었는지, 그의 머리는 매일 엉겨 붙어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드릭은 언제나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다니며 멋진 친구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레드릭이 갑작스럽게 학교생활을 접고 핀란드로 돌아가게 되었다. 너무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프레드릭은 러시아에서 지내며 다양한 전자기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의 방에 몇 번 놀러 간 적이 있었기에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대략 알고 있었다. 우리 학교에는 핀란드 출신 친구들이 꽤 많았기 때문에, 아마도 그들에게 먼저 좋은 물건들을 정리할 것 같았다.


며칠 후, 기숙사 광고판에 프레드릭이 자신의 물건들을 판다는 광고가 붙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물건은 저렴하게 내놓았는데 냉장고만 유독 비싸게 팔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냉장고만 남고 다른 물건들은 금세 정리되었다. 프레드릭이 제시한 냉장고 가격은 6,000루블(약 24만 원)이었다. 그가 구매했던 가격을 생각하면 비싼 편은 아니었지만, 학생들에게 6,000루블은 큰돈이었다. 나는 가격을 조금 깎아 5,000루블(약 20만 원)에 사는 걸 목표로 했다. 이 금액은 내가 설정한 예산과 얼추 맞았고, 프레드릭의 냉장고는 2년밖에 사용하지 않은 거의 새 제품이었다.


x_0b09d8f5.jpg 우리 반 핀란드 친구들의 공연


프레드릭의 방에 찾아가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악수를 나누며 가벼운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다 나는 냉장고를 구매하고 싶다고 말했고, 프레드릭은 흔쾌히 냉장고를 살펴보라며 안내해 주었다. 내부는 약간 지저분했지만, 깨끗이 닦아 사용하면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이 냉장고가 내가 구매해야 할 운명의 냉장고라는 확신이 들었다. 더 이상 창문 틈 사이에 식료품을 보관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이 밀려왔다.


나는 프래드릭에게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프래드릭, 나 냉장고 사려고!"

프래드릭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근데… 천 루블만 빼줄 수 있어?"

그 순간, 프래드릭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렇게 대화는 끝났고, 프래드릭은 단호했다. 나는 웃으며 문밖에 서서 "생각해 보고 다시 올게"라고 말했다.

6천 루블이 큰돈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쉽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프래드릭과 친구임에도 네고를 해주지 않아서? 아니면 단순히 내가 너무 예산을 꽉 잡고 있어서?

이런저런 고민만 하다가 일주일이 지나버렸다. 이제 프래드릭이 떠날 날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는데, 다행히도 냉장고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프래드릭을 찾아갔다. 우리는 반갑게 악수하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냉장고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프래드릭이 단호하게 "안돼!"라고 외치며 문을 힘차게 "쾅!" 닫아버렸다.

아직 가격을 깎아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혹시 내 속마음을 읽은 걸까?

그렇게 문전박대를 당한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방으로 돌아갔다.


고작 천 루블 때문에 프래드릭과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결국 프래드릭의 냉장고를 사기로 결심했다.

다음 날, 나는 다시 프래드릭의 방을 찾아갔다. 이번에도 우리는 가볍게 악수하며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나는 주저하지 않고, "6천 루블에 냉장고를 사고 싶어,"라고 말했다.


"오, 친구!! 좋아 좋아, 그러면 바로 옮겨줄까?


프래드릭의 태도는 달라졌다. 네고 없이 산다고 하니 다시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고, 친한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했다. 나는 프래드릭에게 6천 루블을 건네고, 둘이 힘을 합쳐 냉장고를 내 방으로 옮겼다.

그렇게 다음날, 프래드릭은 핀란드로 떠났다. 우리는 뜨거운 악수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고, 서로의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한편으로는 천 루블도 깎아주지 않은 프래드릭이 살짝 얄밉기도 했지만, 그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좋은 냉장고를 저렴한 가격에 구매했으니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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