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속에서 잃어버린 아빠찾기
같은 학교에서 알게 된 일본인 친구 마리꼬는 키는 작지만 매력적인 외모와 밝은 성격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러시아어도 유창했고, 누구보다 똑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보다 7살 많은 마리꼬와는 기숙사 주방에서 종종 마주쳤다. 같은 동양인으로서 낯선 러시아 땅에서 연극을 공부하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학교 생활에 대한 고민이나 연극을 공부하며 겪는 어려움을 나누곤 했다. 게다가 러시아어 개인지도 선생님도 같아서 자연스레 공부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오갔다. 기숙사에서 만나면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마리꼬는 결단력과 강단이 있는 사람이었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배역을 맡지 못하게 된 적이 있었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러시아어로 번역된 일본 희곡을 무대에 올렸다. 그녀는 이 작품을 학교의 레퍼토리 정기 공연으로 선정되도록 이끌었으며, 직접 연출과 배우를 섭외하고 주연까지 맡아 작품을 완성했다.
또한, 외국인으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문제 상황이 생기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외국인 관리 학부를 직접 찾아가 문제를 시정할 것을 요구하는 당당함을 보였다. 마리꼬는 인생 선배로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 친구였고,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여느 때처럼 기숙사에서 마리꼬와 이야기를 나누던 날이었다. 주제는 자연스럽게 배역과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캐릭터를 구축할 때, 모방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 같아"
"맞아. 우리도 아직도 일주일에 한 번씩 관찰 수업을 하고 있어."
"정말?" 마리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희곡에서 내가 맡은 역할도 우리 엄마의 특징을 좀 가져와서 캐릭터를 만들었어."
그녀의 말에는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족의 모습을 투영하며 진정성을 담으려는 고민이 느껴졌다. 나도 자신이 경험하고 관찰한 것들을 바탕으로 캐릭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캐릭터 창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연스럽게 가족 이야기가 이어졌다. 마리꼬는 그녀의 부모님에 대해 차분히 이야기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시는지, 연령대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그리고 형제자매가 있는지도 들려주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따뜻한 가족애가 느껴졌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내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 혼혈이라는 사실과 나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를 마리꼬에게 전했다. 그녀는 내 이야기에 무척 반가워하며 흥미로워했지만,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조금 안타까워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한 번 일본어를 배워보는 건 어때?" 마리꼬가 제안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배우고 싶어."
그날 대화는 서로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지만, 공통점과 차이점을 통해 더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나는 혼혈이라는 내 존재가 불편했다. 남들과 다르다는 점이 불편하게 느꼈던 걸까? 어디 가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편했다. 내가 혼혈이라고 단 한마디도 한적이 없었음에도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은 나를 보며 일본인처럼 생겼다며 놀려댔다. 쪽발이, 왜놈 등 보통 비하하는 별명을 붙여 불리곤 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 때문일까? 자연스레 내 존재에 대해 위축되어 왔던 것 같다.
"쪽발이", "왜놈" 같은 비하적인 별명을 붙여 부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려 했지만, 그때의 경험들이 내 안에 깊게 새겨졌던 것 같다. 그것들이 원인이었을까? 내 존재에 대해 스스로 위축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 뿌리를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게 된 건.
그저 평범한 아이로 보이고 싶었다. 튀는 존재로 보이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마리꼬와의 대화를 통해 나는 조금씩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가진 혼혈이라는 정체성을 흥미롭고 특별하게 봐주었고, 그런 반응이 나를 조금씩 위로했다.
"고향이 어디예요?"
이 질문은 언제나 나를 곤란하게 했다. 러시아 사람이나 외국인 친구들이 "어디서 태어났어?"라고 물을 때면 나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특히 러시아 어학당에서는 가장 먼저 배우는 문장 중 하나가 이 질문이었기에 더 당황스러웠다.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을 법한 질문이지만, 나에게는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 질문을 받을 때면 대답을 피하거나 거짓말을 하곤 했다. 태어난 곳을 밝히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 필요는 없겠지만, 이상하게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인 커뮤니티나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전 서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어쩌면 내가 지은 또 하나의 가면이었을지도 모른다. 대답이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에게는 그게 더 편했다. 내 진짜 고향을 밝히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왜 나는 이런 질문 하나조차 자연스럽게 대답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내 정체성에 대한 복잡한 감정과 남들과 다르다는 불편함이 내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1990년 1월 1일, 도쿄 여자대학병원에서 내가 태어났다. 아빠의 성을 따라 내 이름은 '야마구치 갱'이었다. 갱이라는 이름에는 '건강함'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일본식 이름으로 불리며 잠시나마 일본에서 살아갔던 나날들. 첫돌까지 일본에서 치렀고, 그 이후로는 한국에서 엄마와 단둘이 살게 되었다.
어린 시절, 아빠와 함께 보낸 시간은 길지 않았다. 1년에 두세 번, 짧은 만남을 위해 한국과 일본을 오갔다. 그 만남들은 오래 머물지 못한 추억이 되었지만, 두 나라의 경계에서 성장하는 나에게는 특별한 경험으로 남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야마구치 갱'이라는 일본식 이름도, 일본에서의 기억도 점점 희미해졌다. 하지만 그 시절의 흔적은 내 안에 깊숙이 남아 있다. 그것은 단순한 과거가 아닌,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중요한 조각이었다.
아빠가 한국에 오는 일정은 대부분 3박 4일이었다. 내게 '3박 4일'이라는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흘러가는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그 짧은 순간은 아빠와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고, 그 시간만큼은 정말 즐겁고 행복했다.
아빠는 흡연자였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담뱃연기는 싫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직접 담뱃불을 붙여주는 그 행위가 좋아서, 매번 그 순간을 기다리곤 했다. 다른 사람들의 담뱃연기는 불쾌했지만, 아빠의 담뱃연기는 마치 특별한 향기처럼 느껴졌다.
아빠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날이 오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공항에서 아빠를 배웅할 때마다 큰소리로 울어댔다. 엄마가 뜯어말려야 할 정도로 통곡하곤 했다. 어린 나에게 아빠의 부재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손꼽아 기다렸다. 일본에 가서 아빠와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내 모든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비행기표는 늘 미리 예매되었고, 나는 달력에 그 날짜를 표시해놓고 하루하루 엑스 표시를 하며 기다렸다. 아빠와 하고 싶은 것들은 공책에 미리 적어놓고, 통화할 때마다 이야기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이던 어느 날, 엄마가 갑자기 아빠와 이혼했다고 말했다.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너무나 허무했다. 아빠와의 연결고리가 한순간에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소중히 간직해 온 기다림과 희망이 산산조각 난 것 같았다.
2011년 어느 날, 러시아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던 일본 대지진 소식이 전해졌다. 연기 수업 중이던 교수님께서도 갑작스러운 소식에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쓰나미와 지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수업이 끝난 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인터넷에서 일본 관련 뉴스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아빠가 살고 있다는 도시의 이름이 기사에 등장했다. 그 순간 아빠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영상으로 본 일본 현지의 모습은 너무나 참혹했다. 폐허가 된 거리와 무너진 건물들,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빠와의 인연을 가슴 한구석에 묻어두고 살아가던 나였지만, 이 비극적인 소식은 그 기억을 다시 꺼내어놓았다. 어쩌면 잊었다고 생각했던 아빠가 그 순간 내 마음 한가운데 떠오르고 말았다.
'지금 아빠는 몇 살이지?'
아빠의 나이를 세어보려 했지만, 언제나 젊고 활기찼던 모습만 떠올라 숫자가 잘 맞지 않았다.
'벌써 돌아가신 건 아닐까?'
어느새 마음 한구석에서 무거운 의문이 자리 잡았다. 오랜 세월 동안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으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돌아가시기 전 꼭 한번 만나면 좋겠다.'
아빠와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며,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빠는 괜찮은 걸까?'
지진과 쓰나미의 참혹한 피해 속에서, 아빠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걱정이 떠나질 않았다. 이 질문들은 밤새도록 머릿속에서 떠다녔다. 답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함은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고, 내가 아빠를 조금이나마 그리워하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했다.
아빠를 떠올리며 점점 그리움이 커져갔다. '어떻게 지금까지 연락할 생각조차 못 했을까?' 스스로를 자책하며 지나온 시간이 원망스러웠다. 아빠의 연락처 하나 모르는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결심했다. '어떻게든 아빠의 소식을 찾아야겠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아빠를 다시 만날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성장한 내 모습도 보여주고, 아빠와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고 싶어.' 그동안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감정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며 나를 움직이게 했다. 미뤄둔 그리움을 이제는 행동으로 바꿀 때라고 느꼈다. 이 결심은 내게 무언가를 바꾸기 위한 첫 걸음이었다.
나는 마리꼬를 찾아가 내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마리꼬, 정말 미안한데 아빠 좀 찾아줄 수 있어? 혹시 아빠를 찾아볼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해서…."
갑작스러운 부탁에 마리꼬는 살짝 놀란 듯했지만,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빠라니… 일본에 계시다는 거야? 이름이나 사는 곳에 대해 아는 정보는 있어?"
나는 아빠에 대해 알고 있는 단서들을 최대한 설명했다. 이름, 예전에 살던 도시, 그리고 어렴풋이 기억나는 몇 가지 정보들까지.
마리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줄게. 아는 사람들 통해 방법을 찾아보자. 일본에서는 주민등록 기록 같은 공적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 하지만 과정이 복잡할 수도 있으니 차근차근 해보자."
그녀의 적극적인 반응에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마리꼬가 나와 함께해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래된 그리움을 풀어갈 수 있는 희망이 생긴 듯했다.
마리꼬는 일본 지진으로 최근 개설된 생사 확인 웹사이트를 알려줬다. 대지진 이후 행방불명자들을 찾기 위한 시스템으로, 이름과 생년월일을 입력하면 정보를 조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이트가 내게 마지막 희망처럼 느껴졌다. 설레는 마음으로 정보를 입력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아빠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커져 갔다. 마음 한편에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모든 것을 이겨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아빠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렇게 며칠 뒤 마리꼬가 찾아왔다.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마리꼬에게 질문을 마구 던졌다.
"어떻게 됐어? 찾았어? 무슨 소식 있어?"
하지만 마리꼬의 표정은 어두웠다.
"미안해… 일본에 '야마구찌 신이치'라는 이름과 성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아. 사이트에서 자세한 정보를 찾는 게 어렵더라고."
그 말에 내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마리꼬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현재로선 불가능하다는 말로 상황을 정리했다.
너무 기대했던 것일까? 마음이 쿵 하고 가라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아직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았는데, 뭐가 그렇게 아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마리꼬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마도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일본에 직접 가서 출생했던 병원이나 동사무소를 방문해 기록을 확인하는 거야. 필요하면 사설탐정을 고용해서 찾는 방법도 있어."
마리꼬의 제안은 현실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직접 일본으로 가야 한다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당장 러시아에 있는 내가 일본에 있는 아빠를 찾을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손을 놓고 있기엔 가슴속에 답답함이 밀려왔다. 뭔가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빠와의 연결고리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언젠가 아빠를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일본어로 직접 대화하고 싶다.' 그런 마음 하나로, 나는 바로 그날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아빠, 왜 우리랑 같이 안 살아?"
"아빠, 한국에 있으면 안 돼?"
어린 시절의 내가 가슴속에 품었던 이 두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언젠가 아빠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이 질문을 하고 싶다. 내가 품고 있던 답을 직접 듣고 싶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내 출생 기록과 관련해 헤어진 아빠를 찾을 방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한 끝에, 일본 도쿄시청에 외국인을 위한 민원 및 지원 부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특히 그곳에는 한국인을 전문적으로 돕는 재외동포 담당자가 있어, 일본어를 잘 하지 못해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큰 희망이 됐다.
나는 일본 도쿄 시청에 전화를 걸었다. 중년의 여성분이 친절하게 한국어로 응대해 주셨다. 내 상황과 사정을 이야기하자,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며, 아빠를 찾을 가능성도 열어두셨다. 일본에서 출생한 경우, 부모의 개인 정보를 반드시 동사무소에 등록해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며, 이를 통해 아빠의 집 주소, 전화번호, 주민등록 번호까지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먼저 가장 유력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는 도쿄 여자대학병원과 이야기해 보겠다고 했다. 내 출생 기록만 남아 있다면 아빠를 찾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내가 거주했던 동사무소의 위치와 지명을 기억하지 못해, 동사무소의 도움은 받을 수 없었다.
며칠 뒤,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다시 도쿄 시청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도쿄 여자대학병원의 개인정보는 10년 주기로 폐기되어 당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절망했다. 이후 다른 여러 방법으로 아빠를 찾으려 했지만, 시간도 너무 많이 흘렀고, 비용 또한 감당하기 어려웠다.
군 복무를 마친 후, 나는 일본으로 직접 찾아가 아빠를 찾기 위해 애써 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전문 탐정을 고용하지 않는 이상 아빠를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들었다. 사설탐정을 고용하는 비용은 터무니없이 비쌌고, 그 금액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결국, 나는 아빠를 추억으로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만날 수 없더라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아빠와의 기억은 영원히 소중히 간직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아빠를 찾게 된다면, 과연 어떨까? 사실 내 마음 한구석에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빠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을 것이고, 혹여 나를 완전히 잊었거나 마음속에서 이미 정리했을 수도 있다. 내가 갑자기 나타난다면, 함께 지내고 있는 다른 가족들은 어떤 마음일까? 그들에게 내가 어떤 존재로 비칠까?
그리고 아빠도 나를 보고 싶었다면, 왜 나를 찾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아빠를 찾게 된다면, 아마 멀리서나마 잠깐 얼굴만 보고 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가 살아 있다면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