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이 있어서 6년을 버틸 수 있었다.
내 인생은 라면
라면을 유독 좋아했던 나는 신라면과 삼양라면을 특히 즐겨 먹었다. 두 라면의 명확한 개성과 깊은 국물 맛이 내 입맛에 딱 맞았다. 하루에 한 번은 꼭 라면을 끓여 먹을 정도로 라면에 진심이었고, 맛있게 끓이는 방법을 연구하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덕분에 친구들 사이에서 '라면 잘 끓이는 친구'로 통했고, 우리 집에 놀러 오면 반드시 라면을 먹고 가는 게 불문율이었다. 친구들마다 취향이 다르다 보니, 나는 1인 1냄비로 라면을 각각 따로 끓여 대접하곤 했다. 모두 내 라면 맛에 감탄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학생 시절 나는 라면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대단했다. 서울 곳곳에 숨어 있는 라면 맛집을 찾아다니며 탐방하는 데 정성을 다했다. 각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라면집은 빠짐없이 방문했고, 직접 사 먹으며 맛을 비교하곤 했다.
소문난 라면집 대부분은 신라면을 베이스로 삼았다. 국물에는 꼭 계란을 풀어 넣어 걸쭉하게 만들고, 물 양은 적게 잡아 짭짤하면서도 매운맛을 살리는 것이 그들만의 비법이었다. 라면 한 그릇에 단무지와 직접 담근 김치를 곁들였는데, 김치는 대개 살짝 쉰 상태로 제공되곤 했다.
라면 가격은 보통 2천 원에서 비싼 곳은 3천 원 정도였다. 당시 라면 한 봉지가 450원 정도였으니 꽤 비싼 편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라면 맛집들을 찾아다닌 이유는 요리하는 사람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라면 맛의 매력 때문이었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을 넘어, 라면 한 그릇에 담긴 정성과 개성을 경험하는 일이 즐거웠다.
라면과의 이별
러시아 유학을 결정하면서 내가 가장 좋아하던 라면과는 잠시 작별해야 했다. 유학 준비 중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러시아에서 한국 라면을 구할 수 있는지였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에서는 한국 라면이 수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내가 사랑하던 신라면과 삼양라면은 당분간 내게서 멀어질 운명이었다.
비행기로 가져갈 수 있는 짐의 무게는 고작 23kg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6년간의 유학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이 안에 다 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간단한 옷가지, 조미료, 생필품만 챙겨도 무게가 금세 차올랐고, 결국 라면은 짐 목록에서 제외해야 했다.
그러던 중 커뮤니티를 통해 뜻밖의 희소식을 접했다. 러시아에서도 'Доширак(도시락 컵라면)'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록 한국 라면과는 맛이 다르겠지만, 러시아의 마트에서 손쉽게 현지화된 도시락 컵라면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는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비록 내가 알던 그 맛은 아니겠지만, 라면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지 않을까 싶었다.
3루블짜리 봉지 라면
기숙사 근처 러시아 마트에서 가장 먼저 찾은 건 역시 라면 코너였다. 생각보다 다양한 현지 라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가격대는 최저 3루블(약 120원)에서 50루블(약 2,000원)까지 다양했다. 대부분 닭고기를 베이스로 한 하얀 국물 라면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도시락' 컵라면은 현지 라면 시장에서 중간 정도의 가격대에 속했다. 지나치게 비싸지도, 저렴하지도 않아 구매하기 부담 없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호기심을 자극한 건 단연 최저가 라면인 3루블짜리 봉지 라면이었다. 맛은 뒤로 하고, 그 저렴한 가격에 매료되어 10개를 구매했다. 총 가격은 30루블. 도시락 컵라면 두 개 가격으로 봉지라면 열 개를 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렇게 합리적인 소비는 없었다.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곧바로 라면 봉투를 뜯었다. 그런데 조리법이 조금 특이했다. 끓는 물에 라면을 삶는 한국식 방식이 아닌, 접시에 라면과 스프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뒤 냄비 뚜껑을 덮고 기다리는 방식이었다. 마치 컵라면을 조리하듯 간단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며, 이 독특한 라면이 어떤 맛을 선사할지 기대에 부풀었다.
라면의 크기는 정말 작았다.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라면이 접시 위에 올려져 있는 모습을 보니, 한 끼 식사로는 부족해 보였다. 뜨거운 물을 부은 뒤 3분이 지나자 면이 적당히 익었다. 그러나 스프는 소금과 후추를 섞은 듯 단순했고, 면은 약간 흑빛을 띠는 독특한 색감이었다. 처음 접하는 면발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닭' 국물 맛을 어떻게 구현했을지 더욱 궁금했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 모금 떠서 맛보았다. 수많은 라면을 경험해 봤다고 자부했지만, 이 라면의 국물 맛은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독특한 맛이었다. 짠맛이 이국적이면서도 낯설었는데, 특별히 맛있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맛이었다.
이어 면발을 한 젓가락 먹어봤다. 이 부분에서 충격이 더했다. 면발은 윤기 없이 푸석거렸고, 씹는 순간 툭툭 끊어졌다. 적당한 쫄깃함이나 탄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3루블짜리 라면은 가격만큼의 맛을 보여줬다고 해야 할까. 이 경험 이후로 결심했다. 더 이상 3루블짜리 라면은 돈을 주고 사 먹지 않기로.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을 몸소 체험한 순간이었다.
러시아에서만 존재하는 도시락 3가지 맛
러시아에 현지화된 도시락 라면은 총 3가지 맛으로 출시되었다. (현재는 더 다양한 맛이 추가되었다고 한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맛이 대표적이며, 러시아인들의 입맛에 맞춘 독특한 국물 베이스로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색다른 국물 맛과 조합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닭고기 맛 도시락이다. 이 라면은 이경규의 꼬꼬면이 나오기 전부터 러시아 현지에서 즐길 수 있었던 하얀 국물 베이스 라면이었다. 비슷한 닭고기 국물 베이스를 가진 러시아의 다른 라면들보다 훨씬 풍부하고 깊은 맛을 자랑했다.
무엇보다 도시락 라면의 면발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러시아 라면이 푸석거리고 쉽게 끊어지는 식감이라면, 도시락의 면발은 탱글하고 쫄깃한 느낌이 살아있었다. 한국 라면을 먹는 듯한 만족감을 줬고, 이는 냄비에 끓여도, 컵에 바로 먹어도 맛있게 느껴졌다. 러시아에서 도시락 라면은 단순히 한국의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음식을 넘어, 현지화된 매력으로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라면이었다.
도시락에 젓가락 대신 포크가 들어있다
러시아에서 컵라면을 먹으면서 흥미로웠던 점 중 하나는 바로 젓가락 대신 작은 일회용 포크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컵라면을 먹을 때 나무젓가락이 기본인데, 러시아 사람들에게 젓가락 사용은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러시아의 컵라면에는 젓가락 대신 포크가 기본으로 제공된다.
이 포크는 생각보다 작지만 의외로 튼튼하고 실용적이다. 나는 이 작은 포크를 꽤 유용하게 사용했다. 특히 학교에 도시락(진짜 밥을 담은 도시락)을 싸갈 때 함께 챙기곤 했다. 작지만 가볍고 편리한 덕에 식사를 즐길 때 종종 도움이 되었다.
컵라면 하나에도 문화적 차이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젓가락과 포크의 차이가 단순히 식습관의 차이를 넘어, 일상 속에서 다른 문화를 경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도시락 봉지라면의 등장
러시아에서 컵라면으로만 즐길 수 있던 도시락 라면이 봉지 형태로 새롭게 출시됐다. 컵라면보다 크기는 작고 가격은 더 저렴했으며, 러시아 대형 마트에서만 판매되고 있었다. 봉지라면의 가격은 7~9루블, 한화로 약 400원 정도였는데, 기존 컵라면 대비 절반 정도로 저렴한 가격이었다.
봉지라면은 한국에서 먹던 방식처럼 끓는 물에 조리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조리 방식이 더 자유로워지니 다양한 재료를 넣어 내 입맛에 맞게 즐길 수 있었다. 반면, 면발의 두께와 수프의 양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한 번에 두 개씩 끓여야 배가 찰 정도였다.
한국에서 먹던 익숙한 봉지라면의 조리 방식과 비슷해서 반가웠지만, 구하기 어렵다는 점이 아쉬웠다. 대형 마트에서만 판매되다 보니 기숙사 근처 마트에서는 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저렴한 가격과 기본에 충실한 맛 덕분에 즐겨 찾던 라면이었다.
이왕 먹는 라면 맛있게 먹자 : +대파 +구운김
라면을 끓일 때 나만의 비법으로 추가하는 세 가지 재료가 있다. 이 재료들 덕분에 평범한 라면도 특별한 한 끼가 된다.
첫 번째 : 대파
대파는 라면 수프와 면을 넣은 후 추가해야 제맛이다. 대파가 국물에 너무 익기 전에 넣어야 시원한 맛과 아삭한 식감이 살아난다. 특히 살짝 덜 익은 대파는 국물의 깊은 맛을 더해준다.
두 번째 : 계란
라면에 계란은 금상첨화다. 계란을 국물에 풀어주면 매운맛을 완화시키고 담백함을 더해준다. 고수들은 계란을 미리 접시에 풀어 준비한 뒤, 라면에 천천히 흘려 넣는다. 이 방법을 쓰면 국물이 더 부드럽고 식감도 훌륭하다.
세 번째 : 양념 되지 않은 구운 김.
마지막으로, 양념되지 않은 구운 김을 추가한다. 일반 김은 향이 강해 라면 맛을 해칠 수 있으니 반드시 불에 살짝 구운 김을 사용해야 한다. 구운 김은 국물에 넣으면 고소한 향이 퍼지고, 김을 잘게 부숴서 넣으면 라면의 풍미가 배가된다. 단, 너무 많이 넣으면 국물 맛이 달라질 수 있으니 김 반장 정도가 적당하다.
이렇게 간단한 재료 몇 가지만 추가해도 라면은 더 풍성하고 특별한 요리가 된다. 가끔은 이런 작은 정성이 큰 만족을 준다.
현지에서 도시락을 구할 수 있다는 희소식을 들었을 때, 마른 김은 이미 챙겨 온 상태였다. 하지만 대파는 가져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러시아에서 대파를 구할 방법을 찾아다니던 중, 다행히 대형 마트에서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형 마트에 한 달에 한 번씩 다녀오면서 커다란 대파를 두 봉지씩 구입했다. 집에 돌아와 대파를 라면에 넣기 좋은 크기로 잘라 소분한 뒤, 큰 반찬 통에 넣어 냉동 보관했다. 이렇게 준비하면 한 달 동안 대파를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이 작은 준비로 라면의 맛과 풍미를 유지하며, 유학 생활에 소소한 즐거움을 더할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처음 맞은 혹독한 겨울은 상상 이상으로 추웠다. 하지만 기숙사에서 끓여 먹는 라면 한 봉지는 그 추위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다. 뜨거운 국물이 온몸을 녹이고, 익숙한 맛은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길고 긴 6년간의 러시아 유학 생활 동안 도시락 라면은 그저 한 끼 식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유학 생활의 든든한 동반자였다. 만약 도시락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 뜨겁고 맛있는 추억들은 없었을 것이다. 도시락 덕분에 나는 러시아의 추운 겨울을 이겨내며 맛있고 뜨거운 유학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