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온 지도 벌써 4년이 흘렀다.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 먹을 것만 고민하며 고군분투했지만, 이제는 혼자 영화도 보러 갈 만큼 여유가 생겼다. 최근에는 러시아 음식도 즐기기 시작했다. 런치 세트로 블린을 사 먹으며 기분을 내고, 샤실릭이나 샤우르마도 종종 맛본다. 언어에 익숙해지니 문화까지 즐길 여유가 생겼다.
러시아 유학생으로 지내면서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바로 학생증이었다. 학생증만 있으면 박물관과 극장을 무료로 이용하거나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었다. 덕분에 수준 높은 러시아 연극, 오케스트라, 발레, 미술, 박물관 등 다양한 예술을 마음껏 누렸다. 이렇게 러시아를 깊이 경험하며 점점 더 사랑하게 되었고, 어느새 러시아를 제2의 조국처럼 여기게 되었다.
가끔 강의가 취소되어 잠깐의 여유가 생기면 산책을 나가곤 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산책길은 학교 근처에 있는 러시아 여류 시인 아흐마또바의 생가 공원이었다. 공원은 작지만, 100년 이상 된 나무들로 가득 차 있어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여 있지만 하늘이 열려 있어 가끔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이 무척 좋았다. 공원 모서리의 벤치는 늘 내 자리였다. 거기서 러시아 문학에 푹 빠져 몇 시간씩 책을 읽곤 했다. 원문으로 읽어도 해석이 가능할 정도로 러시아어 실력이 부쩍 늘었음을 느꼈다.
러시아어 실력을 활용해 통역에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일상적인 대화와 통역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단어 선택과 상황에 맞는 표현, 그리고 제품에 적합한 언어적 감각이 필수라고 했다. 하지만 4년간 갈고닦은 러시아어 실력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러시아에서의 통역 일은 주로 비즈니스, 외교, 정치와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철저한 준비가 반드시 필요해 보였다.
러시아 통역원은 대부분 KOTRA나 영사관을 통해 모집되고 있었다. KOTRA는 한-러 경제 무역과 관련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며 종종 통역원을 구했다. 통역비는 하루 기준 200달러를 현금으로 지급했다. 한 달에 한 번만 통역을 맡아도 한 달 생활비의 절반을 벌 수 있는 셈이었다.
KOTRA에 러시아 통역원 지원 서류를 제출했다. 며칠 후 면접과 언어 테스트를 위한 일정이 잡혔다. 다양한 기업의 대표와 임직원을 상대하는 업무인 만큼, 철저한 테스트를 거쳐 선발된 인원만 통역원으로 활동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근거 없는 자신감에 특별한 준비 없이 면접과 테스트에 임했다. 사실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 준비 자체를 하지 못했다.
면접관은 KOTRA 직원인 세르게이라는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나에게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러시아에 온 이유, 그리고 다니는 대학교와 전공에 대해 물었다. 질문은 생각보다 어렵거나 부담스럽지 않았다. 이어 세르게이는 KOTRA의 사업과 통역 업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며칠 후, 감사하게도 KOTRA 통역원 면접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 달 평균 두 번 정도 통역 업무가 있으며, 언어 능력이 뛰어난 사람부터 차례로 배정된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도 첫 번째 통역 임무가 주어졌다. 국내 중소기업과 러시아 기업 간의 무역 컨퍼런스에서 한 국내 중소기업의 통역을 맡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첫 통역인 만큼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 이메일로 배정된 회사의 소개서를 받았다. 100가지가 넘는 다양한 물품을 해외로 유통하는 작은 무역 회사였다. 회사 소개서를 읽고 물품들에 대해 조사하며 통역 준비를 시작했다. 예상되는 단어와 숙어를 정리해 A4 용지에 하나씩 기록했는데, 결국 4장을 가득 채웠다.
무역 컨퍼런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센나야 광장에 있는 한 호텔에서 열렸다. 호텔 1층 로비에 마련된 큰 룸에 국내 기업들의 부스가 설치되었고, 총 10개 정도가 자리했다. 내가 맡은 무역 회사의 부스는 가장 안쪽에 위치했다. 부스에는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사님이 앉아 계셨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아 오늘 통역과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사님은 고무장갑, 수세미, 때타월을 주력 제품으로 러시아 시장에 진출하려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에게는 대략적으로 제품이 좋다는 점만 잘 설명해주면 된다고 했다. 직접 제조하는 상품이 아니다 보니, 이사님께서도 제품의 특징이나 장점에 대해서는 잘 모르신다고 덧붙였다.
때타월을 러시아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때'라는 단어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생전 입에 담아보지 못한 단어인데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 더욱 난감했다. 고민 끝에 '더러움(그랴즈)'이라는 명사를 선택해 통역하기로 했다. 적절한 뉘앙스를 살리면 '때'의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 머리를 굴리며 제품의 장점을 어떻게 부각할지 키워드로 정리해나갔다.
1. 생산 : 모든 제품이 한국에서 제조되었다. (러시아에서는 한국 제품에 대한 인식이 좋다)
2. 특별함 : 때타월은 일반 목욕 타월과 다르다. (거친 면으로 몸을 닦으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3. 가격 : 중국 제품과 비교해도 높은 품질을 유지하면서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제공할 수 있다.
문제는 통역 준비를 하는 동안 이사님께서 계속 말을 거셨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업무와는 전혀 관계없는 근육 자랑, 여행 이야기, 심지어 본인의 재산을 세세하게 보여주며 자랑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무역 컨퍼런스를 빨리 끝내고 분위기 좋은 술집에 가고 싶다며 나에게 술집 안내를 부탁하기까지 했다.
분위기있는 술집에 대해 알지도 못할뿐더러 통역 준비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정중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통역 준비에만 몰두하려 했다. 그러나 이사님은 러시아 고객이 오기 전까지도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며 몸매를 자랑하셨다. 통역 준비에 집중하고 싶었던 나는 점점 화가 치밀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그럼에도 반드시 잘 해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러시아 손님들을 맞이했다. 이것은 나에게 통역사로서의 첫 무대가 아니던가? 첫 통역을 완벽히 완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러시아 바이어가 자리를 떠나자마자 이사님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자신의 근육이 얼마나 대단한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손님 응대도 대충대충 진행하는 모습이 이어졌다.
"그냥 좋다고만 해. 한국에서 만든 제품이니까 Made in Korea라고 말하면 돼."
그래도 이왕이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러시아 바이어들에게 제품의 특징을 찾아가며 즉흥적으로 설명했다. 예상보다 러시아 바이어들의 질문이 날카로웠고, 그에 맞는 대답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통역을 하면서 제품의 특징뿐 아니라 무역과 관련된 대화도 많이 오갔다. 대부분 선박 컨테이너를 통해 거래가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무역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다 보니 통역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처음 접하는 무역 개념과 용어들은 낯설었지만 신기하고 흥미롭게 느껴졌다.
예상보다 많은 러시아 기업이 한국 기업에 관심을 가지고 컨퍼런스에 방문했다. 러시아의 유명 대기업인 가즈프롬도 참석했다. 내가 자주 가고 좋아하는 러시아 초대형 마트를 운영하는 관계자들도 방문했다. 그들은 우리 제품에 흥미를 보이며 명함을 주고받고 인사를 나눴다.
러시아 관계자: 굉장히 흥미로운 제품이네요. 한국에서는 이 제품을 많이 사용하나요? 몸을 닦으면 어떤 효과가 있는 거죠?
이사님: 아, 이거~ 때가 쫙쫙 밀려요, 쫙쫙! 그리고 내구성이 좋아서 오래 쓸 수 있어요. 자, 보세요. 당겨도 끊어지지 않아요! (그러면서 팔 근육을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나: ...^^ (속으로 당황하며 미소를 지어 넘긴다.)
이사님의 재치 있는 행동 덕분인지, 러시아 바이어와 메일을 통해 유통 방안과 가격에 대해 보다 자세히 논의하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때타월과 고무장갑이 내가 자주 가는 러시아 대형 마트에 유통되길 바라는 마음에 더욱 열심히 통역했다. 점심 먹을 틈도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나니, 아침 8시부터 대기했던 일정이 오후 6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이사님은 계속해서 나와 술집에 가자고 제안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어차피 나는 술도 끊은 지 오래였고, 따라가 봤자 이사님의 뒤치다꺼리를 할 것 같아 빠르게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통역을 마치고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KOTRA에서 이번 행사에 참여한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설문 항목 중에는 제공받은 서비스와 통역원의 수준 및 능력에 대한 평가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그래도 이사님께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역 중간중간 욱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하게 행동했던 덕분에 돌발적인 실수를 하지 않았다. 다행히 평가를 무사히 통과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만약 이번 평가에서 문제가 됐다면 내 첫 통역은 곧 마지막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