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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Jan 20. 2021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아닙니다만,

작은 영화관 매니저의 일기 01




마지막으로 내 딸 얘기를 해줄게. 이름은 새봄. 이제 곧 대학생이 돼. 나는 새봄이를 더 배울 게 없을 때까지, 스스로 그만 배우겠다고 할 때까지 배우게 할 작정이야.


편지에 너희 집 주소가 적혀 있긴 하지만 너한테 이 편지를 부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한테 그런 용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만 줄여야 겠어. 딸이 집에 올 시간이거든. 언젠가 내 딸한테 네 얘길 할 수 있을까.


용기를 내고 싶어.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야.


...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영화 <윤희에게>




2019년 겨울. 11월이었을까, 12월이었을까. 영화 <윤희에게>를 상영한 어느 날 저녁의 기억이 선명하다.


나는 보통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할 때쯤 슬며시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 있는다.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불을 켜지 않는 영화관이지만, 그 전에 나가는 관객들에게 문을 열어주기 위해서다. 상당히 조심히 닫지 않으면 쾅 하는 문 소리를 걱정하는 것이기에, 말하자면 나가는 관객을 위하는 서비스라기 보다는 남아 있는 관객들을 위하는 쪽에 가깝다.


그날은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일찍 들어가 뒤에 서서 관객들과 마지막 장면을 함께 보게 됐다. 몇 장면 위로 흐르는 윤희의 나레이션. 쥰에게 쓰는 편지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윤희와 그를 예쁘게 바라보는 새봄의 모습 위로 청명한 편지 내용이 들린다. 그러다가 조금 갑작스레 블랙아웃이 되고, 들리는 마지막 대사.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그 다음으로 까만 스크린에 영화 제목이 뜨면서 뒤에 서있는 나도,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도 영화가 끝난 걸 알게 된다. 그 순간. 이상할 정도로 간질거리면서 벅차오르는 감정이 들었다. 영화에 감명 받아서가 아니었다. <윤희에게>는 상영을 결정하기 전에 스크리너로 먼저 봤었고, 좋은 영화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개인적인 선입견을 반영한 착각일 수도 있는데, 엔딩 즈음 상영관에 있으면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가 느껴진다. 재밌는지 지루한지, 감동인지 불만인지, 영화가 끝나지 않길 바라고 있는지 어서 끝나길 기다리고 있는지... 그 분위기는 영화에 따라 고정된 값이 아니라 어떤 영화와 어떤 날의 관객들이 우연히 만나 함께 만들어내는 산물인 것 같다.


<윤희에게> 마지막에 이상한 감정을 느낀 그날은 유독 분위기가 특별했다. 크레딧이 오르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관객들이 영화 내내 축적해온 감정이 영화관 안 공기에 탁- 하고 퍼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물감이 물 안에 퍼지듯 일순간 탁- 하고 퍼지는 느낌이었다. 관객들이 이 영화에 몰입했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영화 <윤희에게>




가끔 내 일을 무시하는 사람들로 인해 치명적인 회의감에 빠지곤 하는데, 이런 순간은 그런 나를 치료하는 아주 효과적인 약이다. 대전 격투 게임에서 죽어가고 있다가 게이지가 풀로 채워지는 느낌이랄까. 3년 전 완전히 다른 일을 했던 전 직장에서 지금 일하는 곳으로 이직할 때, 한 선배가 이직을 말리며 이런 얘길 했었다. "너가 좋아하는 걸 남들도 좋아했으면 하는 마음인 거잖아. 그거 여기서도 할 수 있어." 나름대로 복잡하다고 생각했던 이직 이유를 이렇게 한 마디로 정리해버리니 별 거 아닌 것 같아 민망했지만 핵심을 뚫는 말인 것 같았다. (여기서도 할 수 있다는 말엔 동의를 못해 결국 이직을 했지만.)


그렇다. 나는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영화를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공유하고 싶어 영화관 프로그래밍이란 일을 하고 있다. 이건 내가 이 일을 시작한 이유일 뿐 아니라 이 일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좋은 영화를 나누는 일이 어찌 헛될 수 있을까. 내가 만든 건 아니지만, 내가 선택해서 가져온 어떤 영화를 관객이 보고 감동 받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나는 세상에서 일분일초 발생하는 모든 감정에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존재하지 못했을 감정인 것 아닌가. 그 감정이 존재하도록 도왔다는 건 엄청 뿌듯한 일이다.


이날은 마지막 회차였던 <윤희에게> 상영을 끝낸 뒤 엄청 부자가 된 기분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마감을 하고 퇴근했다. 지금 이 순간 이 감정의 공기는 임대형 감독님도 못 느끼는 거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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