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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Jan 30. 2018

세일즈맨 (2016)

영화 <세일즈맨>


문제의 기저에 위선이 있다면, 표면에는 '말의 부재'라는 현상이 있다. 인물들은 침묵 혹은 거짓말로 원래 있어야 했던 말의 자리를 비워둔다. 말하는 자는 무언가를 빠트리고 듣는 자는 빈틈을 멋대로 상상해 제각기 진실에서 멀어져 간다.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이른바 확증편향에 빠지는 것이다. “왜 말 안 했어?”라는 대사는 진실을 마주했을 때 그 간극의 탓을 타인에게로 돌리려는 뒤늦은 시도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첫째, 그 속에 자기 잘못이 있다는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온갖 얘기가 나오는게 두렵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이유는 서로 모순된다. 자기 방어적이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첫째가 진실을 숨기기 위한 것이라면 둘째는 거짓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곧 진실을 드러내려 하면 다른 방향에서 거짓을 맞닥뜨리게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발화로 인해 발생하는 온갖 외부의 이야기가 더 큰 고통을 야기할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말을 하지 않은 <세일즈맨>의 인물들이 옳았을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을해야 했을까?


<세일즈맨>은 누구도 탓하지 않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 난감한 문제를 무마한다. 아쉬가르 파라디는 모든 인물을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로 그리지만 어느 누구도 악인으로 몰지 않는다. 감정을 천천히 밀착해 따라가면서 오히려 이들의 오류를 자연스럽게 이해시키고 감싸 안는다. 나아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전복되는 상황을 통해 <세일즈맨>의 인물들이 범한 잘못을 보편으로 확장한다. 이미 명백한 죄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피해자의 구도에 있던 에마드가 가해자를 해하는 상황을 덧붙여 누구나 가해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자신도 ‘누구나’ 중 한 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에마드의 윤리적 딜레마에 동참한다. 아쉬가르 파라디는 모든 인물을 두루 이해할 기회를 주고선 관객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까지 돌아보도록 유도한다. 이는 그가 가진 능력 중 가장 빛나는 것이다.


열린 관찰과 내적 성찰을 가능케 하는 것은 치우치지 않은 시선이다. <세일즈맨>은 어떤 전지적 관찰자가 모든 상황을 설계해놓고 흘러가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는 듯 진행된다. 조정실에서 연극무대를 내려다보는 스태프의 시선이 연상되는바다. 현실의 그 주체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전(前) 세입자인 것 같다는 육감도 든다. 조정실 스태프와 전 세입자(혹은 누가 됐든 시선의 주체), 조명콘솔과 전기 스위치, 연극 무대와 붕괴된 집. 연극과 현실은 상응하고, 이로 인해 환기되는 것은 현실의 허구성이다. <세일즈맨>의 인물들은 거짓으로 이루어진 자기만의 좁은 방을 살아간다. 이는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 그런 면에서 <세일즈맨>이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취한 장면들은 우연이 아니다. 에마드는 자신이 연기하는 세일즈맨의 위선을 닮아가고, 바박을 향한 에마드의 반감은 사장을향한 세일즈맨의 분노로 이어진다. 레퀴엠 장면은 현실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렇게 연극과 현실은 활발히 서로를 침투하며 서로에 대한 은유가 된다. 마침내 에마드는 본인이 피해자라 믿었던 좁은 방을 빠져 나와 진실을 마주한다.


평점: 4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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