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학원 영어강사로 살아남기 48
동네 학원에서 영어 강사 일을 시작한 나는 주로 초중학생들을 많이 가르쳤다. 한 곳에서 이동 없이 8년 정도 있다 보면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아이가 훌쩍 커서 중학생이 되고, 중학생이었던 아이들은 수능을 치고 졸업해서 어른이 되었다며 으스대는 귀여운 모습도 볼 수 있다.
덕분에 나는 아이를 낳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기른 자식 같은 학생들이 많이 생겼고, 학령기 특징을 몸으로 부딪혀 익힐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초등 수업을 점차 줄여가고 있는 요즘, 중고등 수업이 많아지면서 새로운 특징들을 알아간다. 바로 고등학생들의 멘털상태. 오늘의 이야기는 가련한 K-고등학생들의 이야기다.
띠링, 알람이 울린다
눈물로 가득한 문자, ㅠㅠㅠㅠ선생님 수행 망쳤어요
K-고등학생들은 3월 입학하자마자 모의고사, 수행평가, 중간고사, 수행평가, 모의고사, 기말고사의 사이클을 경험하게 된다. 놀랍게도 이렇게 한 바퀴 돌고 나면 1학기가 끝이 난다. 어른들이 보기에 6개월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로 나누고, 각각 수행평가와 지필고사의 비중대로 점수 환산을 하는 이 작업은 꽤나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아이들 입장에서 잠깐만 생각해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아이들이 아직 진로를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기부는 진로에 따라 일관적이게 쓰는 게 좋다는데, 아직 진로도 없는데 뭘 쓰라는 걸까? 수행평가도 자기 진로탐구를 보여줄 수 있는 도서를 골라서 리포트를 쓰고, 진로에 대한 흥미를 반영한 보고서를 써오란다. 아니, 진로를 못 정했다니까?!
꿈과 직업을 동일시하고 있는 아이들의 현 상태도 문제지만, 흥미 탐색에 대한 기회 자체도 너무 적다. 그리고는 마치 지금 작성하는 너의 수시용 생기부가 너의 인생에 아주 막대한 영향을 줄 것처럼 이야기를 하니 아이들은 겁을 먹어버린다.
'선생님 수행 망쳤어요 어떡해요? 듣기는 10프로 들어가고, 단어도 10프로 들어간데요'
' 아직 중간 안쳤는데도 이번 1학기 내신 벌써 망한 것 같아요'
속된 말로 두부멘탈을 가진 아이들은 너무 많다. 문제가 생기면 부딪히기보다는 피하기를 선택하고, 부딪히고 나서 넘어지면 다시는 못 일어날 것처럼 일단 울고 보는 아이들. 어떡해요? 하느라 시간을 다 써버리고 다음 공부할 시간을 다 날려버리는 경우도 너무 많다.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으면 빨리 잊어버려, 다음 거 하러 가자'
아무렇지 않게 말했더니 아이들의 공격(?) 이 돌아온다.
' 선생님 T죠! 어떻게 그렇게 말하세요 ㅠㅠㅠㅠㅠㅠㅠ'
' T든 아니든 빨리 정신 차리고 다음 거 하러 가, 울지 마 눈물 때문에 문제 안 보여'
말하면서도 나도 마음이 아픈데, 아이들은 쉽게 믿지 않는다. 이게 쌤이 너를 응원하는 방식이란다.
'저 이번에 열심히 했는데, 열심히 안 한 애들이 저보다 점수 잘 나오는 것 같아요'
나는 종종 수업시간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빨리 받아들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다면 이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일단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최선을 다하고 나오는 결과가 항상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한다.
살아가면서 어떤 일에 자기가 투입한 input 만큼 output 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학생들은 성적이나 인간관계를 마치 게임처럼 자기가 3을 투자했으면 3이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아이들이 그 생각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를 가능한 빨리 알아차렸으면 좋겠다.
번외)
단어를 외웠는데도 안 외워져요, 응 그럼 가서 5번 더 써, 5번 더 썼어요 그래도 안 외워져요, 그럼 가서 10번 더 써, 쟤는 3번만 해도 외웠어요, 당연하지 사람마다 필요한 암기에 필요한 횟수는 다른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