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_사랑에 있어 '만약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남자친구는 '보고싶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아무리 많이 들어도 설레는 그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반사적이거나 형식적으로 '나도' 라고 말하지 않고 그 말의 무게를 잠시 되새기고 마음을 다해서 대답한다.
옛 남자친구들은 수줍음이 많아서, 무뚝뚝해서, 감정표현에 서툴러서 등 각자의 이유로 사랑한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특히 전 남자친구는 5년 이상을 만났지만 내 기억에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헤어지고 보니 그런 점이 몹시도 서운하고 과연 그가 정말 나를 사랑하기는 했나 5년의 시간이 허송세월처럼 느껴져 분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는 입이 아닌 온 몸으로 제 나름의 사랑을 표현하던 사람이었다. 내성발톱 때문에 고생하던 내 발톱을 주기적으로 직접 깎아주고 가끔 집에 놀러오면 냉장고를 싹 정리하고 굴러다니는 재료로 반찬을 만들어 채워 넣어두었다. 절대 새로 재료를 사지 않고 집에 있는 걸로만 만든다는 점이 굉장히 존경스러웠다. 말은 투박했지만 행동은 섬세하고 다감한 사람이었던지라 별다른 애정표현이 없어도 외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점차 우리는 대화를 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고 몇 번의 상처되는 말들을 주고받고 오해가 쌓이며 서로를 조금씩 잃어갔다. 5년 동안 불타오르진 않았지만 조심스레 키워온 감정이었기에 지키고 싶다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냐고도 물었다. 그의 대답은 없었다. 나는 그때 어떤 사랑은 작게 태어나 조금씩 자라나다 서서히 죽어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 '사귀자'는 말도 없이 시작했던 것처럼 우리는 '헤어지자'는 말도 없이 이별했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우리 사이에 사랑이 존재함을 알았듯
더 이상 우리 사이에 남은 것이 없음을 뼛속 깊이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락이 끊기고 한 달쯤 뒤에 그에게 연락이 왔다. 집 앞에 왔는데 줄 것이 있으니 잠깐 보자는 것이다. 조금은 그을린 얼굴을 한 그는 일본에 자전거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리고 꽤 묵직한 종이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올라와서 차 한 잔 하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그는 일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집에 와서 봉투 안을 보니 상자 안에 곱게 포장된 그릇들이 담겨있었다. 나는 너무나 놀랐고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와 사귈 당시 함께 일본여행을 가서 인테리어숍을 구경하는데 아주 마음에 드는 그릇을 발견했다. 여행 첫날이라 짐이 무거워질 것이 걱정되서 아마 다른 숍에도 있을테니 다른 날 사야겠다며 구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행이 끝날 때까지 다른 숍에서 그 브랜드의 그릇이 눈에 띄지 않아 단념해야 했고 한국으로 돌아오며 그때 그 그릇을 샀어야 했다고 후회의 뜻을 내비친 적이 있다. 일년도 훨씬 지난 일인데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가 자전거 여행 중에 이 무거운 그릇 세트를 사서 들고왔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그답게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선물이 고맙다는 메시지를 남겼고 그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답을 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무뚝뚝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 연락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정말 서로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듯 살아갔다. 오직 사랑으로만 연결되었기에 그 사랑이 없어진 지금 우리의 관계는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와 헤어지고 한동안 나의 지난 연애를 되새김질하며 생각했다. 만약에 우리가 말로서 서로에게 좀 더 다정했다면 어땠을까. 조금 더 유치하게 속을 드러냈다면 어땠을까. 보고싶다고, 사랑한다고, 안고싶다고 그날그날의 기분을 흘려보내지 않고 표현했다면 결과는 달랐을까. 부질없는 말의 힘을 빌어 서로를 더 붙들 수 있었을까. 수많은 가정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 '만약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지금 남자친구로부터 '사랑해'라는 고백을 듣는 것은 설레면서 가슴 한구석이 저릿한 일이다. 하지만 그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면 나는 내 멋대로 의미를 덧붙인다.
(지금은) 사랑해.
지금 여기, 우리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지만 '사랑해'라는 말이 사랑의 영원을 약속하는 선언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그 마음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조금씩 자라나는 이 마음을 더 소중히 지키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하고 싶어진다.
사랑은 하늘에서 퍼붓듯이 쏟아지는 비가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힘을 모아
길러올리는 우물 쪽에 가깝다는 것을 이제 알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말이 바닷가 모래 위에 새긴 글자 같은 거라고 해도 좋다. 파도가 와서 지금의 마음을 쓸어버려도 매일 다시 글자를 새기면 되니까. 삶의 허무를 이겨내는 것이 사랑이라면, 말의 덧없음을 몸과 마음으로 이겨내는 것이 사랑하는 자의 의무라는 걸 내 지난 사랑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사랑에 있어 '만약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내는 쪽이 사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