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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Oct 25. 2020

임신하는 순간부터 즐겨야 할 것

출산하고 난 다음에서야 아쉬워하는 그때 그 순간


결혼 3년 차, 계획 임신을 시도 한지 몇 개월이 지났다. 여느 때처럼 지인들과 함께 하는 모임 장소로 이동 중 한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추위가 많이 느껴지고 배가 시리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이번엔 임신 아니야?' 하는 느낌은 많았지만 4,000원짜리 임테기만 몇십 개 버렸기 때문에 이번에는 최대한 기대를 낮추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싸한 느낌은 모임 장소에서도 이어졌다. 이런 게 바로 임신 촉 또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임신 확신 느낌이라는 걸까. 왠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기대해 보고 싶은 불확실한 감정 때문에 오늘이 아니면 마시지 못할 것 같아 맥주도 한 캔 마시고, 새벽까지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임신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열심히 놀았다.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이상한 한기와 그놈의 '느낌 적인 느낌' 때문에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임신테스트기를 해봤다. 그 동안 테스트기 후 기다리는 3-4분의 시간은 정말 길었다.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실눈 뜨며 최대한 팔을 뻗어 테스트기를 두 손으로 잡고 서서히 내 눈 쪽으로 돌려가며, 두 줄인지 한 줄인지 확인하던 조마조마한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정확한 한 줄로 '너 임신 아니야' 하고 확인시켜주던 분홍색 플라스틱 막대기 하나에 감정이 왔다 갔다 했었다.


이번에는 뭐가 그렇게 확신에 찼을까 정확히 3분을 기다린 후 희미하게 피어나는 빨간색 장미꽃 같은 두 줄을 보았다. 한 번 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정확한 두 줄이다.


임신이다.

그렇게 9개월 만에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는 빨간 장미꽃처럼 진하고 아름답게 나에게 왔다.


그래도 아직 확신할 수 없으니 다음 날 병원에서 혈액검사를 해보기로 했다. 항상 나의 입방정은 한 줄 결과를 가져왔고 그래서 그런지 이번엔 더 아끼게 되고 조심스러워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꼭 지키고 싶었다.


"어.. 검사 수치가 조금 높게 나왔는데..."

"아 임신테스트기 했는데, 두 줄 나와서 확인차 한 번 해보려고요!"

"축하합니다. 임신이네요!"


엄마의 음력 생일에 맞춰 찾아온 나의 아기. 그리고 그 주 주말 친정에 가서 임신테스트기를 친정 부모님께 먼저 보여드렸다. 입은 귀에 걸려있지만 아직 확실치 않으니 초음파까지 해보고 다시 말해달라며 나를 진정시키는 부모님의 잔잔한 어조에 리듬이 있었다.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밥은 거의 못 먹었고 니글거리는 속은 물론 잦은 속쓰림과 골이 흔들리는 것 같은 엄청 고통스러운 두통으로 유난스럽게 입덧을 시작했다. 당기는 음식은 하나도 없었고, 조금만 먹어도 체한 것 같은 느낌으로 음식과의 안녕을 고했다.






회사에는 최대한 늦게 알렸다. 임산부 단축근무 신청을 해야 해서 임신 후 한 달 정도 지나서 알릴 수 있었다. 우리 회사에서는 임산부 단축근무의 제일 첫 스타트가 나였고,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졌다 해도 여자 직원 그리고 임신을 한 여자 직원을 바라보는 회사의 입장은 아무래도 아주 조금은 다를 테니까. 임산부 단축근무로 인해서 오후 3시에 퇴근을 했지만 퇴근해서 뭐하지 하며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집에 도착하면 속쓰림에 못 이겨 가슴을 부여 잡고 괴로워했다. 물을 조금만 마셔도 속이 좋지 않으니 무조건 자는 방법밖에 없었다. 내 임신 단축근무 후의 생활은 그렇게 속쓰림과 잦은 두통 그리고 잠으로 보냈다.


보건소에서 임산부 자동차 등록증을 받아 차에 부착을 하고, 무료로 나눠주는 철분제도 받았다. 그리고 임산부만 사용할 수 있는 국민행복카드를 발급받아 병원비의 부담을 아주 조금 덜었다.


남편과 나는 사실 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임신하고 나서도 정말 바라던 일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실감이 잘 나지 않았고, 내가 곧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뿐더러 적응도 되지 않았다.


나는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 혹시나 회사에서 '임신해서 저렇다' '임신하고 나니 일이 소홀하네' 하는 말을 들을까 타이트한 업무복을 임신 8개월까지 입으며 티 나지 않게 그리고 티 내지 않고 일했다.


임신하고 나서도 일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었고, 더 나서고 한 발 물러서지 않았다. 물건을 옮기거나 어떤 행사를 준비할 때도 여전히 적극적이었고 그런 태도 때문에 내가 임신한 줄 몰랐던 회사 직원이 엄청 많았다.


어느 날 회사에 자식 셋을 키우고 계신 실장님이 나를 조용히 부르시더니 해줄 얘기가 있다고 하셨다.


요즘은 그래도 세상이 변했어.
나 때만 하더라도 회사에서 임신한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국가적으로도 그리고 
회사 내에서도 복지가 좋잖아.
지금 본인이 임신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곧 엄마가 될 거라는 기대감을 많이 가지고 티를 좀 많이 냈으면 좋겠어



"그러고 싶은데, 아직은 시선이 좀 그래서요..."


"아기들도 엄마가 스트레스받는 것 다 느끼고, 김 팀장이 행복해야 아기도 행복해. 이건 정말 분명해. 조금 더 많이 내려놓고 너무 일만 잡고 있지 말고 임산부의 모습을 좀 많이 드러냈으면 좋겠어"



몇 분간의 대화, 그 실장님이 바라보는 나는 의무적으로 책임감을 다하려고 했던 모습이 아등바등, 그리고 아슬아슬해 보이셨나 보다.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 임신, 임신 후 태아를 품고 있는 행복한 감정과 임산부로서 조금 내려놓을 수도 있는 일에 조금 더 자유롭고 행복해졌으면 하는 그분의 마음은 느껴졌지만 그 후로도 내 태도는 별 차이가 없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출산 휴가, 그리고 일주일 뒤 나는 장미꽃 같은 빨갛고 보드라운 딸아이를 출산했다.

 

아이가 커서 이제는 6개월이 되었다. 이제야 실장님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으며 이해할 수 있다.

'그때 조금 더 내가 아기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많이 표현했다면...' '임신했던 10개월을 조금 더 임산부처럼 누렸다면...' 하는 생각들이 든다. 출산하고 나니 아쉬워진다. 임신하는 순간 즐겨야 할 것 들은 생각보다 많다.




1. 임산부를 향한 사람들의 배려에 당연하다 생각해도 된다.

임신을  여자는 업무의 중심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했다. 겪어보니 케바케다. 사람마다  업무 특성마다 다르다. 하지만 공통된 것은 '임산부' 이기 때문에 배려받을 상황은 분명히 있다. 예를 들면  있어야 하는 상황에 의자에 앉아 있을  있다거나, 바지를 입어야 하지만 치마로 변경한다던지 하는... 아주 사소한 것들,  상황 조차 무시해 가며 괜히 프로페셔널해 보이려고 했던 지난날이 조금 아쉽다.


2. 구두에서 잠시 내려오자.

나는 10개월 내내 구두를 신고 다녔다. 여성스러운 스타일로 출근을 하기도 했지만, 임신을 했다고 해서 내 외형적인 모습에 변화를 주기 싫었다. 9개월이 다 되어갈 때 외근을 나가는 일이 있었는데 그땐 오늘 신발 선택 정말 실패구나 할 정도로 피곤한 날이 있었다. 고생을 사서 했다.


3. 남편에게 나 딸기가 먹고 싶어라고 자주 말하자.

입덧이 서서히 끝나가고 조금씩 음식을 다시 먹을 수 있었을 때 나는 딸기만 먹었다. 과일만 엄청 당겼고, 그 시기가 한창 딸기 철이어서 딸기가 들어갈 때까지 딸기를 많이 먹었다. 한 박스를 사면 그 박스의  반이상을 한 번에 다 먹을 정도였으니. 퇴근 후에 과일 가게에서 딸기를 항상 두 박스씩 사서 가곤 했다. 내가 뭐가 먹고 싶은지 그리고 뭐가 필요한지 남편에게 더 자주 말했어야 했다. 남자들은 여자와는 다르게 말로 직접적인 표현을 하지 않으면 정확하게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조금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 지금 딸기가 먹고 싶어'라고 정확하게 말해야 알 수 있다. 사랑의 어떠한 표현도 마찬가지 겠지만. 표현하자.


4. 출산 후의 생각은 출산 후에 하자.

임신하고 나서는 호르몬의 변화가 예민한 시기 이기 때문에 엄마의 컨디션이 왔다 갔다 한다. 그중에는 출산 후에 '내가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출산 후에 나는 어떻게 될까' 하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심각한 마음에 괜히 생각이 깊어지는 날이 많았는데 모든 일이 그렇듯 다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니다. 출산 후에 생각해야 할 일들은 아기를 낳고 해도 늦지 않다. 아마 그때는 왜 고민했는지도 모를 정말 사소한 에피소드가 되어 있을 테니.


5. 기대하자.

여자의 인생이 성장하는 건 회사의 승진이 아니었다. 엄마가 되고 난 이후, 생각과 마음가짐이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내 인생의 승진이라고 할까. 임신 10개월, 그리고 출산 후 6개월인 지금 까지 나는 매일매일 새로운 상황을 만나고 내일을 또 기대하는 중이다. 기대감이 많은 날일수록 그 날의 육아 컨디션도 달라진다. 기대하자. 엄마로서의 뉴 노멀 시대를.





나는 '출산 후 달라질 내 삶이 나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 중에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제한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럴 땐 언제나 남편은 나의 행동에 긍정적이었다. 아기를 재운 후 TV 쇼의 여행 프로그램을 보고 있던 내가 작게 속삭였다.


"아... 가고 싶다"

남편은 이 말을 놓치지 않고 반응해준다.


"가자, 가면 되지, 뭐가 문제야?"

상황에 따라 지키지 못할 그의 약속이라도 이런 기분일 땐 무시하고 싶다. '


가시 돋친, 앞이 뻔히 보여 생각만 해도 힘든,

어느덧 육아에선 어떤 대명사가  '아기랑 여행'

장미꽃 같이 아름답게 자는 나의 아기 얼굴을 보며 기쁘게 또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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