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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Feb 10. 2020

우리들의 황홀한 해방: 버즈 오브 프레이

2020

<버즈 오브 프레이>를 이야기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고 싶은 영화가 있다. 마블의 <캡틴 마블>이다. 나는 <캡틴 마블>의 열광적인 팬이었다. 영화 굿즈를 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처음으로 캡틴 마블의 자수가 박힌 자켓을 샀다. 뱃지도 사봤다.

 그녀의 '강함'은 여성 팬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단순한 강함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이유 아래 고꾸라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강함이었기 때문이다. 단 하나, 캡틴 마블에게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그녀가 너무 강해서 통쾌했지만 공감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강함은 내가 스크린에서 보고 싶던 여성의 강함이었되 내가 결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강함이기도 했다. (잠깐 첨언; <원더 우먼>이 아니라 <캡틴 마블>을 논하는 이유는 <원더 우먼>이 내게 아무 감흥도 주지 못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어로 무비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히어로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의 인물이니까. 그런데 <버즈 오브 프레이>는 <캡틴 마블>에서 아쉬웠던 바로 그 지점을 현실로 가져온다.

'할리 퀸'은 조커와 헤어지면서 고담의 빌런들 전체에게 노출된다. 할리 퀸의 캐릭터 서사는 전형적인 가스 라이팅을 당한 여성의 서사이다. 그녀는 조커에게 조종당하고, 진짜 사랑을 받지 못하면서도 그에게 매달려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스스로 암시한다. 그녀가 상담사였다는 사실은 항상 조커가 얼만큼이나 미친 악당이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붙는 부가 설정이었다. 예컨대, '조커'는 그렇게나 '미치고 무서운' 악당이라 그를 치료하던 '심리상담사'조차도 그에게 '물들어' '빌런이 되었다.' 이것은 팩트이고 할리 퀸의 캐릭터는 이 서사를 영원히 넘어가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할리 퀸이 조커에게 버림받는다. 그러면 이 할리 퀸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그녀에게는 이제 '조커'도 없고 더는 '심리상담사'도 아니며 '빌런'이라기에도 아무에게도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다들 그저 그녀를 조커의 액세서리 정도로만 생각할 뿐이었으므로 그녀를 도우려는 사람도 없다. 그녀는 갑자기 철저한 혼자가 되어버린다. 그런데도 영화의 부제목은 '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이다. 그녀는 물론 조커에게서 해방되었지만, 그녀가 바라서가 아니었다. 조커와 헤어지며 줄줄이 붙은 그녀를 노리는 살인자들도 그녀의 바람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그녀의 '해방'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걸까?

다른 지점을 짚어보자. 블랙 카나리가 좋겠다. 카나리는 '블랙 마스크' 로먼 밑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정이 많은 사람이다. 할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처음, 둘이 만난 그 날, 할리가 술에 취해 어떤 남자들에게 납치당할 뻔했을 때 카나리는 그녀를 구한다. 카나리가 착하고 정이 많아서? 아니다. 할리는 만취 상태였고 할리를 데리고 있던 남자는 할리에게 무슨 짓인가를 하려고 했다. 카나리는 무시하고 지나치려다 결국 멈추어 선다. 나는 이 지점에서 모든 여성들이 같은 생각을 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어떤 여성도 그 상황에서 만취한 할리를 두고 혼자 집에 돌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카나리가 아니고, 장정들을 때려눕힐 수도 없으므로 뛰쳐나가 할리를 구하지는 못했겠지만 경찰서에 전화를 하고 그들의 차량 번호를 외우고 숨어서 뒤따라갔을 것이다. 다른 장면도 있다. 할리 퀸이 자신을 배신했다는('배신'이라는 단어가 적절하지 않긴 하지만) 사실에 격노한 로먼이 어떤 여성을 테이블에 강제로 올리고 옷을 찢는 장면이다. 영화는 그 장면이 얼마나 끔찍한 장면인지 알리기 위해 여성의 알몸을 완전히 노출시키거나 여성을 때리지 않는다. 대신 카나리가 옷이 찢기는 여성을 보며 우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또다시 확신할 수 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여성들은 그간 보아왔던 수많은 여성 폭력의 장면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볼 때마다 수치스러웠고, 분노했고, 배우의 안위를 궁금해했지만, '영화라서' 넘어가야 했던 장면들이 생각났을 것이다. 카나리의 눈물은 그녀가 착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우리 여성들의 눈물이었다. 그 테이블 위에 올라가 옷이 찢긴 여성이 내가 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으므로, 그녀가 어떤 기분인지 알고 있으므로, 그녀에게 주는 수치가 곧 내게 주는 수치임을 알고 있으므로 흘릴 수 있는, 연대하는 사람만의 눈물이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해방'을 우리에게 준다. 헌트리스는 일가족이 몰살당한 가운데 살아남은 유일한 여자 아이고 몬토야는 이루는 공을 모두 파트너 남성에게 빼앗겨 계속 현장 일을 해야 하는 형사이다. 카나리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능력이 있음에도 로먼의 밑에서 노래를 부르다 운전사가 된다. 할리는? 조커에게 버림받자 아무것도 아니라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그녀들은 분노에 차 있다. 생존해서, 빼앗겨서, 버림받고 쫓겨서 분노하는 중이다. 나는 이것이 '해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드디어 우리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히어로 무비를 가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생존자라 분노하며 정당한 우리의 것을 빼앗겨서 분노한다. 내가 온전한 나로 보이지 않아서 분노한다. '나'를 가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투쟁하고 쫓겨야 하는 삶에 분노한다. '너희들 없이도 우리는 존재할 수 있다'는 캐치프라이즈가 여성의 생계를 끊는 일이 되는 세상에서, '조커가 없는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사람들의 앞에서 '나는 미쳤고, 너희를 모두 겁에 질리게 할 거고, 미스터 J 없이도 고담에서 살아남을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해방이다. 

이것은 할리 퀸 혼자만의 해방이 아니었다. 버즈 오브 프레이 팀의 해방이었고 스크린 앞에 앉아있던 나의 해방이었다. 카나리가 눈물을 흘렸을 때 나는 비로소 나를 둘러싸고 있던 여성 폭력의 장면들에서 고통스러웠던 것이 나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할리가 주체성을 잃고 손가락질받을 때, 그럼에도 나는 '할리 퀸'이라고 이야기할 때, 주체성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질 치는 행위를 우리라면 누구나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헌트리스가 살아남아 복수자가 된 것도, 파트너에게 공을 모조리 빼앗기고 끝내는 경찰서를 나오는 몬토야도 스크린 속의 히어로가 아니라 현실의 여성들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빼앗아간 자들에게 모두 복수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이 해방을 즐기며 살아갈 것이다. 점점 더 많은 것들을 빼앗고 부수고 되찾아올 것이다. 할리의 말처럼 엉망진창이 되게끔. 왜냐면 우리는 우리로서 살아남을 것이고, 우리의 것들을 빼앗아가려는 자들 앞에서 연대할 것이고, 서로를 지켜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버즈 오브 프레이>는 그저 액션이 시원해서 속이 시원한 영화가 아니었다. '할리 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 조커의 애인, 예쁘고 섹시하기만 한 미친놈, 야한 여성의 가죽을 벗어던지는 점에서 속이 시원했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두고 '굳이 남자들을 그렇게 많이 죽여야 했나'라고 했다는데, 나는 역으로 되묻고 싶다. 굳이 그 장면만 봐야 했나? 정말 그 장면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단 말인가? 

나는 언제나 우리가 살아남은 마녀들의 후손이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버즈 오브 프레이>는 마녀들의 잔치 같은 영화였다. 연대하므로 생존하는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래서 이 영화는 내게도 해방이었다. 그야말로 할리 퀸스러운 연대였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우리는 이미 이런 이야기를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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