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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ul 14. 2020

당신의 용기, 우리의 용기 : 미스 비헤이비어

2020, 필립파 로소프

1. 제니퍼가 무대 위를 혼자 둘러보는 장면. '가축 시장'이라는 말처럼 그 무대 자체가 하나의 구속을 상징하는데 제니퍼는 관객도 심사위원도 카메라도 없이 혼자 무대를 돈다. 제니퍼가 아마도 가장 많이 카메라와 눈을 마주한 인물일 것이다. 제니퍼의 시선은 처음에는 다소 순종적으로 느껴지고, 무대를 돌며 미소를 연습할 때는 조나 샐리와 비교되어 가슴이 미어지지만, 후에 그의 행보에 반전이 나온다. 무대는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틀에 갇혀 본 자만이 틀을 부수고 나올 수 있다.

2. 샐리의 논문. 우리는 모두 겪어본 일이다. 소수자의 목소리를 지우는 일은 인간 역사 내내 계속되어 왔다. 샐리가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빙글 돌아버린 지점도 결국 다수인 그들이 소수인 자신을 그들의 사회에 온전히 받아들일 생각이 아예 없었다는 지점. 그들은 샐리에게 대학 입학을 허락했지만 그저 자리 하나 줄 테니 침묵하고 따르고 우리의 사회를 배우라는 얘기였을 뿐이다. 그들은 소수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몰상식하고 '분위기를 해치는' 말이라는 표현이 계속 나온다. 샐리의 판결은 '평화를 해쳐' 유죄라는 것인데 과연 누구의 평화인가. 왜 누군가의 평화가 다른 누군가의 존재 가치 위에 존재하는가. 그럼 그것은 평화라고 부를 수 있는가. 썩은 물을 덮어 감추는 것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가.

3. 샐리와 어머니의 언쟁. 샐리가 '남성적'이고 싶어한다는 어머니의 지적과 아무 거나 할 수 있는 남성이 당연히 되고 싶다는, 어머니는 갇혀있고 무엇도 못하는 존재였다는 샐리의 반박. 그러나 전에도 말했듯 아젠다의 변화는 대개 한 세대의 시간을 요구한다. 샐리의 어머니는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변화에 적극 가담한 적도 없으나(오히려 보수적이고 반페미니즘적인 모습들이 보인다.) 샐리를 키워냈다. 어머니와 같은 시대 여성들이 꾸준히 가부장제에서의 해방을 외쳤을 것이고 그것은 샐리에게도 이어져 내려온다. 어머니는 본인이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원하든 원치않든 샐리와 그들의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어머니의 존재 자체가 샐리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친 셈. 역설적이게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통해 샐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미래를 꿈꾼다. 그리고 샐리의 희망은 딸에게로 이어질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소수자의 연대는 그런 순환고리를 가진다.

4.. 제니퍼와 샐리의 대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둘의 관계는 여적여의 구도로 보일 수 있었으나 이 씬으로 인해 둘 다 바라보고 있던 세계가 같았다는 걸 확실히 한다. 둘 다 미래의 소녀들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남자들이 짜고 남자들이 주도하는 판에 선 제니퍼도 그 안에서 여성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영화 내내 제니퍼를 미스 그레나다가 아닌 인간으로 대해주는 대상은 오로지 여자들 뿐이다. 샐리는 미인 대회를 혐오하고 직접 시위를 참가하는 레디컬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제니퍼를 비난하지 않는다. 제니퍼 역시 샐리가 판을 망쳤다고 하지 않는다. 둘의 대화 바로 직전에 몰리가 샐리에게 고함지른 것과 정반대다. 둘은 다른 행보를 가졌지만 같은 여성으로서 서로의 의견을 이해한다. 여성이 여성을 혐오하게 하는 주체가 누군지도 또렷하게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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