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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un 13. 2020

우리들의 가능성: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2013, 벤 스틸러

삶을 사랑하는 방법에 관하여 자주 생각하고 있다. 내딛고 받아들이는 것에는 어떠한 방법이나 절차가 없다. 그저 행하는 것. 그러나 행동은 두렵다. 삶의 지표들은 언제나 뚜렷하다.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모퉁이와 사거리에서 지표를 본다. 일종의 이정표이다. 문제는 역시 행하는 것이다. 지표를 보고서도 혹은 마주치고서도 두려워서 지나친 적이 많다. 모든 이정표는 종국에는 변화하라는, 여기서 이제 방향을 바꾸어(혹은 조금 더 나아가) 새로운 지점으로 도달하라는 표시이다. 변화는 두려운 것이다. 그것은 변화의 본질이다. 두려워서 즐겁든, 두려워서 꼼짝을 못하든, 모든 변화는 혼란스럽다.

이 영화에서도 다른 많은 이야기들처럼 지표들을 나열한다. 월터는 지표들을 쫓아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지표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변하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변하였느냐이다. 지표를 구별한 방법이든 지표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방법이든, 과정의 이야기가 빠진다면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월터의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해 생각하기에 앞서 월터의 종착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자. 월터의 종착지는 제목처럼 '상상을 현실로' 가져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모퉁이를 잘 돌았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월터의 은밀한 바람처럼(=월터의 상상에서처럼) 월터는 라이프 표지에 나오던 사람들과 같은 일을 해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치환과는 조금 다르다. 상상과 현실이 치환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월터의 상상은 갇힌(자기 자신에게든, 현실의 문제에게든) 월터의 탈출구였던 동시에 월터의 세계였다. 월터의 현실은 상상과 치환된 것이 아니라 옮아왔다. 어떻게 보면 죽음과 삶처럼, 월터는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옮아갔지 알을 깨부수듯 튀어나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월터는 변했다. 반드시 각성이 아니더라도, 삶을 깨부수지 않더라도 물이 흐르듯, 끊기지 않는 길을 따라서 걷듯 나아갈 수 있다. 변화는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지속은 안정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월터의 방법에 대해 생각해볼 때이다. 월터는 셸리가 부르는 <우주비행사 톰>의 노래, 자신의 상상으로부터 두려움을 극복할 용기를 얻어 이정표를 좇기 시작한다. 셸리의 노래였지만 결국 월터의 노래이기도 했다. 필요한 순간 자기로부터, 사랑하는 존재로부터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 사랑으로부터 나아가는 것, 이는 결국 모든 성장 이야기의 열쇠이기도 하다. 결국에는 이것이야말로 라이프의 모토 "To see things thousands of miles away, things hidden behind walls and within rooms, things dangerous, to come to, to draw closer, to see and be amazed."의 본질이다. 삶을 사랑하고 경험하며 나아가는 일은 히말라야를 오르지 않더라도, 아이슬란드로 가는 작은 어선에 타지 않더라도 우리의 곁에서 가능하다. 사랑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삶의 매순간을 나누고 경험하는 것, 그러기 위한 자신의 용기를 듣는 것, 누구나 본질적으로는 가지고 있는 용기와 문장임을 깨닫는 것. 폭발하는 화산을 향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지 않더라도 매순간 보자 사랑하고자 용기있고자 노력한다면 이정표를 넘어선 성장은 가능하다. 월터의 변화가 부수는 것이 아니라 옮겨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월터가 배운 것은 위험한 비행기에 올라타는 무모함이 아니라 위험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이 삶이라면 선택할 수 있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 도중 월터가 셰릴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다음 지표를 향해 떠날 수 있는 원동력 또한 이러한 시작이다. 자신이 자신을 환송하는 것, 등을 떠밀어주고 사랑하는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물이 흐르듯 수월하게 월터는 지표를 따라/숀을 쫓아 곳곳을 누빈다. 월터의 상상은 비로소 현실이 되어간다. 월터가 애써 그러고자 노력하지조차 않는 사이에.

비로소 숀을 만남으로서 월터의 여행도 끝이 난다. 숀은 어쩌면 월터의 상상 그 자체이다. 월터가 바라던 삶의 정수가 숀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므로 숀이 라이프의 마지막 사진, 삶의 정수가 담긴 사진으로 월터를 선정한 것은 어찌보면 월터의 상상과 현실이 서로에게 주고 받는 선물들이다. 숀은 월터에게 아름다운 것들은 때로는 바라본다고도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월터의 상상과 닮은 한편 차이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시선이다. 늘 내면을 향하던 월터의 시선이 마침내 밖으로 나아가고, 상상이 아니라 현실의 눈표범을 바라보는(ghost cat이 별명인, 월터의 상상처럼 남들이 보기 힘든, 존재 증명 또한 없는) 장면은 월터의 종착지가 어떤 모습일지 시사하고 있다.

그렇게 월터는 돌아온다. 변화는 두렵다고 했다. 그리고 지속은 안정적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계절처럼 지속되는 변화는 어떨까? 하루의 날씨 변화는 드라마틱하고 불안정할 수 있지만, 봄에서 여름으로 변하는 과정은 언제나 일관적이다. 오히려 더 큰 변화임에도 그렇다. 월터의 변화, 상상과 현실의 옮아감은 이와 닮아있다. 화산을 오르면서도 리치에게 보내는 월터의 선물은 스케이트 보드였던 것처럼.

삶을 사랑하는 방법은 행동이라고 했다. 영화는 사랑하지 못해서 망설이던 사람들의 등을 부드럽게 떠민다. 히말라야에 오르지 않더라도, 파괴하며 각성하지 않더라도 이정표를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숀이 찍은 삶의 정수는 우주비행사, 고지대 등산가, 전쟁 영웅이 아니라 회사 건물 앞의 월터 미티,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가능성의 우리들이다.

2014.2.16

옛날 리뷰를 찾아서 들고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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