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의 개구리보다는 광야의 개구리가 되자
그렇게 나는 '나는 왜 이렇게 쓸모없는가.'와 '나 정도면 괜찮지, 잘 살고 있지.' 그 사이 어딘가에서, 비율적으로는 9:1 정도로 꾸역꾸역 자기 파괴 욕구를 억누르며 살아왔다. 전자를 택하니 더 살고 싶지 않았고, 후자를 택하니 현실성이 없었다.
어떤 날은 억지로 내 할 일을 하려 해도 도저히 나 자신이 싫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기분이 우울하면 다른 일을 하면서 기분전환을 하라길래, 운동을 하러 간 상태에서 운동을 하지 못할 정도로 우울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다가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그러던 중에 든 생각은 '내가 너무 가엾고 불쌍하다.'였다. 내 자식이 나처럼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면 그 상황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렇게 자학적인 생각은 버리라고, 그냥 보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를 가엾게 여기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잘 돌보고, 다시 일으켜서 더 행복하고 나은 삶을 살도록 도와주기로 했다.
이야기가 많이 길어졌는데, 다시 '비교하기'라는 주제로 돌아와 보면, 우리는 속세를 떠난 스님이 아니기에 결국 비교하며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비교하기를 멈추면 반대로 뒤처지고 도태될 수 도 있기 때문에, 결국 어느 정도의 비교는 삶에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비교를 이유로 (나처럼) 자기 자신이 무가치함을 확인하는 것에 그친다면 그것 또한 건강한 삶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비교'라는 칼을 거꾸로 잡지 말고 올바르게 잡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 칼날을 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향하게, 올바르게 잡을 수 있어야 한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과 나를 비교해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나는 내가 돌봐줘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유튜브, 책, 인터넷, GPT 같은 양질의 정보를 빠른 속도로 얻을 수 있다. 외모가 못났다면 가꾸거나 성형을 해도 되고, 지식이나 공부가 부족하다면 무엇이든 공부할 수 있고, 직접 못한다면 영상을 통해 간접경험할 수도 있는 시간대와 나라에 우연히 태어났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내가 나의 보호자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나를 잘 키워나가려고 하고 있다. (프린세스 메이커도 잘 키워야 공주님이 되지 않는가.) 그렇게 살다 보니 주변에서 '날씬해졌다. 피부가 좋아졌다. 넌 항상 열심히 사는 것 같아 대단하다.' 라며 칭찬도 많이 받고 있다. 또한 내가 나를 스스로 바라볼 때도 다양하고 작은 성취들이 쌓여서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다는 것이 체감된다.
그러니 자기애나 자신을 사랑하라는 달콤한 자기 위로에 속지 말고, 오히려 '타인과 세상과의 건강하고 냉철한 비교하기'를 통해 더 나은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나가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