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혁’의 <새로운 길>(2023년)
2023년 06월 29일 [인천In] '음악가 이권형의 인천인가요' 기고
산책로로 애용하는 공원 초입에 ‘텃골’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적혀있습니다. 이는 서울역사편찬원에서 편찬한 ‘서울지명사전’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보이며, 내용은 이렇습니다. “구로구 오류동 오류초등학교 서쪽 14번지 일대에 있던 마을로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텃굴 · 기곡이라고도 하였으며, 오류동의 가장 안쪽에 해당되므로 안동네라고도 하였다.”(서울지명사전, 2009. 2. 13., 서울역사편찬원)
옛 마을의 이름은 그 자체로 상징적이어서 들여다보면 미묘하고 다양한 감정과 역사적 진실들이 복잡하게 뒤섞여옵니다. 특히나 도로명주소가 전면사용된 2014년 이후로는, 그것이 왠지 향수 어린 정서에 더 강렬히 닿아 있는듯합니다. 단절된 과거에 대한 일종의 동경. 이 복합적인 무언가의 실체를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6년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가 진행 중이던, ‘옥바라지 골목’(행정구역상 '서울시 종로구 무악동 47번지' 일대)의 역사적 보존 가치를 알아봤던 역사학자들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옥바라지 골목은 서대문 형무소 건너편에 옥바라지를 위해 형성된 여관 골목이었으므로, 독립운동가들을 옥바라지했던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역사적 흔적과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2014년 도로명주소 전면사용이 시행되면서 문헌 자료를 대조해보기가 이전보다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제 도시에서 옛 ‘마을’이라는 장소의 실체를 직접 찾아보긴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역사 속에 겪어온 수많은 단절, 이제 익숙해진 도로명주소 전면사용, 전국의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갈아치우던 70년대 새마을 운동이나, 그것보다도 더 거슬러 6.25 전쟁까지. 나열하자면 수도 없을 역사적, 행정적 단절을 거듭하며 잊혀진 ‘마을’이라는 장소의 실체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윤동주 시인의 시 <새로운 길>이 묘사하는 풍경은 그 숱한 역사적 단절 너머에 존재하는 ‘마을’로 가는 길의 안내서 같습니다. “내를 건너”고, “숲”을 지나, “고개를 넘어”가는 길. 그 길엔 번호가 매겨진 주소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추상적 대상들이 풍경을 이루어 무던히 흘러갈 뿐입니다. 그 광경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주소의 수적 편리함과 대조됩니다. 구획되지 않은 대상들이 자유롭게 유기적인 풍경을 만들며 다가오는, 그래서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새로운 길”.
단절된 과거에 대한 향수에 이끌려 그 언젠가 존재했던, 잃어버린 ‘텃골’의 실체를 지금의 세계에서 명확하게 찾아내려 하는 건 부질없는 일일 겁니다. 중요한 건 그 향수가 우리로 하여금 정량적으로 구획된 행정적 좌표의 편리함 속에서 상실된 가치가 무엇인지 상기시키는 힘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건 매끈하게 문서화 된 지도 속 지리학이 아니라, “민들레”와 “까치”, 그리고 “아가씨”와 “바람”이 흩어지고 모여가며 만들어낸 풍경이라는 것. 그것이 옛 마을의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복합적 향수가 지닌 것과 같은 역사·문화적 유산의 상징성과 <새로운 길>이 안내하는 마을로 가는 길의 풍경 속에서 우리가 찾아 새겨야 할 교훈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원형(原型)에 새로운 결을 더하는 ‘허정혁’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 옛날 잃어버린 마을로 가는 길엔 이토록 고운 바람이 불었나보다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윤동주 詩 <새로운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