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장으로 이 여행에 대해 운을 떼야할지 모르겠다. 기자 일을 시작한 지 만 3년이 지났고 매체도 한 차례 옮겼으며 성격도 많이 뾰족해졌다. 이런 이야길 굳이 하는 이유는 단순히 미얀마로 여름휴가를 떠난 게 아니란 걸 말하고 싶어서. 현실 도피 여행이었다.
남들에겐 이름조차 낯선 미얀마를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가 내겐 셀 수 없이 많았다.
이유 하나. 7년 전 2달가량 태국, 라오스를 배낭여행하면서 비자 문제로 미얀마를 들르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태국, 라오스, 미얀마 삼국은 최대 헤로인 생산지로 골든 트라이앵글이라 불린다. 음식, 숙박, 술, 마약을 비롯한 유흥에 드는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유럽 대학생들이 장기간 체류하며 여행하곤 한다.)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될대로 되라는 식의 인간. 당시엔 지금보다 더 무모해서 출국, 귀국편 이외에 아무것도 예약, 준비 따윈 하지 않고 떠났다. 물론 스마트폰과 어플리케이션, E 비자가 보편화된 시절도 아니다. 그 날 그 날 숙소를 구해야 했기 때문에 길바닥에서 잠들 뻔했던 날도 몇 번 있었다. 그런 내가 미얀마 비자를 준비하고 출발했을 리 만무했다.
이유 둘. 몸고생이 필요했다. 늘 잡념이 많았고 잦은 야근으로 야식, 불규칙한 수면이 일상이었다. 잡지사 에디터는 일반 직장인에 비해 몸 쓸 일이 많은 편이라 굳이 고생할 필요 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주위에 여럿있다. 스탭이 적을 땐 촬영장에서 짐도 옮겨야 하고, 더울 땐 더운 데서 추울 땐 추울 데서 촬영한다. 또 스탭들이 고생하는 걸 나 몰라라 바라볼 성격도 못되니 이래저래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녘 사무실로 돌아와 원고를 쓴다. 피곤한 나날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모든 인프라가 갖춰진 서울에서, 그것도 스마트폰 하나면 야식부터 서류, 잔심부름까지 해결할 수 있는 강남 일대에서 직장생활을 하기 때문에 신체 중 가장 고단한 건 손가락이다. 걷고 오르고 짐을 짊어질 필요가 있었다.
이유 셋. 나는 동남아 체질이다. 동남아 국가에 도착하면 우기, 건기 상관없이 소화도 잘 되고 말씨부터 바뀐다. 영어와 한국어의 언어적, 문화적 차이일 수 있겠으나 표정도 달라지고, 성격도 바뀌니 이만하면 체질이라 말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내가 오래 곁에 두고 사귄 외국인 친구들은 모두 동남아 국가에서 만났다. 친구들은 내가 굉장히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포용력 있는 인간이라 생각한다. 그곳에서의 나는 '서울의 나'와는 분명 다른 인격체다.
이유 넷. 7년간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그 어디든 익숙한 것들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오랜 연애를 끝낸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수도 있겠지만 긴 연애 후에 찾아오는 공허함은 상대의 부재보다, 어떤 게 나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데에 있다. '우리'가 좋아하던 것들에 순전히 내 취향만 있는 건 아니니깐.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낯선 환경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지난 10월부터 일본과 한국인에 한하여 1년 간 미얀마 입국 비자가 면제된다. 내가 여행을 떠난 8월엔 면제를 앞두고 미얀마를 여행하는 한국인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순전히 내 여행 스타일인데, 지난 10년간 열댓 개의 나라를 여행하면서 단 한 번도 한인민박을 이용하지 않았다. 비싼 돈 주고 외국에 나갔으면 최대한 그 나라 문화, 삶에 맞춰 생활하자는 생각이다.) 한국 사람도 적고, 한국어로 된 여행 정보도 적었다. 도피처로 제격이었다.
이유 다섯. 이게 제일 컸는데 나는 배낭 메는 일을 참 좋아한다. 30-50L짜리 배낭 안에, 엉덩이부터 머리까지 내가 먹고 자고 입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넣고 걷다 보면 욕심이 사라진다. 배낭이 나의 소우주처럼 느껴진다. 너무 크면 여행이 버겁고, 너무 적으면 여기저기 도움을 처할 일이 많아진다. 양쪽 모두 불편하다. 흡사 사는 일과 비슷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말보단 잘 모르는 또 때로는 회피하고 싶은 것들로 매일을 채웠다. 그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풀었다. 그러나 동시에 방안을 가득 채운 물건들 앞에 숨이 막히기도 했다. 다 내 업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적당한 삶의 규모를 되찾고 싶었다.
이외에도 떠난 이유는 많다. 하지만 미얀마로 떠나 내가 만나고 느낀 것들은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여행을 기록하는 이유도 그때의 기억, 깨달음을 남겨놓고 싶어서. 살면서 나는 또 넘어질 테고 아니 벌써 몇 번 넘어져 울기도 했으니까, 하루하루 시간을 쪼개 다시 적어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