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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안과수화 Apr 19. 2019

걷는 인간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보면서 적는 몇 글자

우리는 종일 걷는다. 어딘지 모르는 목적지를 향해.


호모 비아토르.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간을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라 정의했다. 한 시도 멈출 수 없는 존재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시간과 공간을 헤치며 ‘나’라는 존재를 찾아 여행한다. “발 없는 새가 있지. 날아가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 앉을 때가 있는 데 그건 죽을 때야.” 영화 아비정전의 아비의 대사처럼 사람들에게 걷는 일은 본능과도 같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어딘가를 향해 걷는다. 철학적인 이야기일랑 접어둔다. 최근 많은 미디어에 걷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평소 하루 3만보를 걷는 걸로 유명한 배우 하정우의 책 <걷는 사람, 하정우>는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유튜브엔 순례자의 길을 걸은 사람들의 영상이 가득하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조차 사람들은 걷는다. 배우 류준열과 이제훈은 <트래블러>에서 배낭을 짊어지고 쿠바 곳곳을 여행한다. 작년엔 GOD는 데뷔 20주년을 맞아 다섯 명의 멤버가 함께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걷는다. 걷는 걸 넘어 배우 차승원과 유해진은 <스페인 하숙>에서 순례자들을 위해 따뜻한 밥 한끼와 숙소를 준비한다. 사람들은 왜 자꾸 걸을까. 삶에 권태와 무기력함이 찾아올 때,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앞두었을 때 우리는 옹송그렸던 몸을 일으켜 걷는다. 거리와 공원을, 때론 도시를 벗어나 자연을 걸어본다. 요즘처럼 내일을 조금도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엔 더더욱.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건 비단 예능 프로그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종교 없이도 많은 사람들이 순례자의 길을 걷는다. 고민을 짊어지고 떠난 길에서 우리는 정답 대신 현실에 대한 걱정을 훌훌 털어버린 나를 마주하게 된다. 삶의 중심을 잃은 사람에게 목적지를 정해두고 걷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몸과 마음이 연결되었다는 진부한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걷기는 내 삶의 큰 영역을 차지한다. 큰 개를 키우는 탓에 매일 산책을 시켜주어야 한다는 이유로 매일 한 시간씩 걷는다. 저녁 왕복 4-5km의 거리를 걸으며 하루를 정리한다. 사색이나 다짐은 하지 않는다. 종일 일하고 말하느라 머리로 쏟았던 에너지를 몸으로 돌려낼 뿐이다. 또 일년에 한 번 일주일 가량의 시간을 내어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두툼한 배낭을 짊어지고 걷는다. 걷기야 말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 중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동작이다. 가빠진 호흡을 고르고 체력이 닿는 데까지 걸으면 잘못 돌아갔던 삶의 방향키가 원위치로 향한다.


불교에서 걷기는 격식을 차리지 않는 명상법 중 하나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시간을 보내는 대신 산책로를 시작해 주차장과 아파트 복도, 마트 그 어디에서나 할 수 있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 움직이는 다리 근육과 어깨의 떨림을 통해 내가 나의 몸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뿐이다. 책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의 작가 안셀름 그륀은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의식하고 발이 땅과 맞닿았다가 다시 그 땅에 놓아주는 느낌에 집중하라. 천천히, 그리고 의식적으로 발을 떼고 다시 내딛는 것이다. 삶의 기술을 이렇듯 매우 일상적”이라며 이것이야 말로 ‘강렬하게 존재하는 기술’이라 말했다. 사뭇 내딛는 발걸음에 힘이 달라진다. 걷기가 그리 거창하겠냐만은 오늘도 우리는 걷는다. 그리고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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