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영혼과 무아지경에 빠진 영혼은 비슷해”
영화 ‘소울’은 음악을 자신의 전부라 여기며 살아온 밴드부교사 조 가이너가 꿈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눈 앞에 두고 죽음에 직면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조금만 지나면 그토록 원했던 꿈의 무대에 오를 수 있는데 ‘머나먼 저 세상’ 행이라니, 조의 영혼은 온 힘을 다해 이탈하나 도착한 곳은 지구가 아닌, ’태어나기 전 세상’이다.
“뭘 봐도 살고 싶단 생각이 안 들었거든, 이유를 알고 싶어”
어쩌다 가게 된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어쩌다 만난 ‘태어날 준비를 해야 하나 뭘 봐도 살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는’ 영혼, ‘22’의 멘토도 되었지만 조는 육체로 복귀할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태어날 생각이 눈곱 만치도 없는 22와 협력하여 함께 손 잡고 지구에 내려가는 일까진 성공하고 마는데, 문제는 서두른 나머지 몸을 잘못 찾아 들어갔다는 데 있다.
누구보다 살기를 열망하는 조와 누구보다 살고 싶어하지 않는 22, 삶에 대해 이토록 상반된 시각과 태도를 가진 이들이 연합하여 만들어내는 온갖 난리법석은, 흥미롭게도 조가 어떻게 삶을 되찾고 그리하여 꿈의 무대에 올랐는지엔 크나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조처럼 분명한 꿈이나 어떤 것을 향한 열망이 없는 상태인 22가 태어나고 살아볼 가치, 작품에선 ‘불꽃’이라 불리는 이것을 찾아가는 과정에 더욱 시선을 맞춘다.
“네가 삶의 목적과 열정을 보여준 거야, 이렇게 불꽃에 가까워진 건 처음이야”
냄새나는 행성이라며 지구를 싫어했던 22가 낙엽과 바람 냄새에서 향기로움을 맡아내고 살아있는 오늘이 건네는 행복을 깨닫는다. 조의 불꽃이 음악이라면 자신의 것은 하늘을 보는 거나 걷기일지도 모른다고, 죽음을 목전에 둔 조가 삶과 재즈를 향해 한층 더 강렬하게 내뿜는 열망에 영향을 받은 것일까. 누구보다 반짝이는 눈빛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의지를 내뱉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22의 희열에 찬물을 끼얹는 이가 있으니 조다. 자신처럼 인생의 전부를 걸 만큼 강하게 소망하는 바가 아니라면 22의 불꽃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그저 사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이라며 인정해주지 않는다. 조에게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의미 없는 삶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무언가 형태를 갖춘 꿈을 이루어내는 삶이야말로 목적을 취한, 뜻 깊은 삶이기 때문이다.
“길을 잃은 영혼과 무아지경에 빠진 영혼은 비슷해”
조와 22의 영혼이 벌이는 이 명확한 대립은 오늘의 우리에게 익숙하다. 성취할 목적이 있어야 의미를 가진 삶이라는 시각은 우리에게 반강제적으로 꿈을 꾸고 목표를 설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겠다고 우리는 바삐 움직이며, 바람의 향 한 번, 따스한 볕 한 번 제대로 맡아보지도, 누려 보지도 못하고 살아간다.
살아 있는 모든 순간들이 살아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소중한데, 좀 더 제대로 살아내자고 만들어낸 삶의 목적에 치여, 정작 진짜 삶은 만끽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은, 살고 싶지 않다는 열망은 살고 싶다는 열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제대로 잘 살아내고 싶은데 그리 되어가지 않고 있다는 스스로의 혹은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엄혹한 평가가 우리를 살고 싶지 않게 만든 거니까.
특출 난 삶의 무아지경을 쫓다 길을 잃은 꼴, 정반대의 모양새를 지녔으나 조와 22의 영혼은, 지극히 닮은 꼴이었다. 영화 ‘소울’은 기가 막히게도 이 두 존재를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서로 등을 맞댄 길목에서 맞닥뜨리게 했고 이를 통해 우리는 일찍이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했으나 놓치고 있었던 중요한 질문 하나를 마주했다. 애먼 곳에서 삶의 불꽃을 찾느라 길을 잃은 영혼이여, 살아 있는 매순간을 즐기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