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출장
“아쉬움이 남아야 그리움이 생기고,
그래야 다시 온다. 곧 다시 오게 될 거야.”
아쉽게도 유럽행은 순수한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공모전 선발을 통해 이뤄진 해외 탐방이었고, 팀원들이 직접 기획한 아이템을 국내에 도입하기 위해 현실성을 검증하는 미션이 있는 여정이었습니다. 지역 마다 계획된 미팅과 인터뷰를 진행해야 했고, 실질적인 결과물도 필요했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즐기는 여행이기보다 해야 하는 일이 뚜렷한 출장에 가까웠습니다.
하필이면 영국에 도착할 무렵, 런던은 지하철 파업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버스에는 발 디딜 틈 없었고, 바쁜 사람들의 행간에는 도시 특유의 치열함이 가득했습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만원 버스에 몸을 억지로 밀어 넣고, 돌아와서도 팀원들과 미팅을 하다 보면 서울에서의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회의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런던에 갖고 있던 로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들이 불쑥불쑥 찾아왔습니다. 그럴 때면 출국 직전에 어머니가 적어 주신 글을 꺼내 보았습니다. 공책 한 장을 북 찢어 적어 주신 글이었습니다.
네 눈이 내 눈이 되어 광활한 하늘과
땅의 구석구석을 헤집으며 따라 가련다.
서두르지도 쫓기지도 않으면서
네 청춘의 흔적을 여기저기 남기며
꿈을 살찌워 오기 바란다.
네 입을 통해 보고 듣게 될 것을 맘껏 기대한다.
(···) 부담스럽게 꼭 무엇인가 얻으려고
발버둥치지는 말자.
깨달음은 불현듯 오는 것이니까.
여하간 안전이 제일이고.
여행의 목적과 일행들의 관계 속에서
성숙이라는 열매를 바라보자.
화이팅!
어머니께서는 저처럼 유럽을 다녀오신 적 없던 분입니다. 가방 속 글귀를 꺼내 읽을 때면 이 시간의 값짐이 되살아났습니다. 교통체증으로 꽉 막힌 도로에서도 2층 빨간 버스를 보면 피식 웃음이 나왔고, 연착된 기차 속에서도 불평보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 순간과 풍경은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아쉬움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색다른 매력을 가진 교외 도시를 그저 미팅만 하고 이동해야 한다거나, 현지인과 여행객들로 인간미 넘치는 풍경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버러우 마켓을 순식간에 지나쳐버려야 하는 순간 말입니다. 아쉬움에 서글픈 표정을 감추지 못한 모습을 본 팀원 중 한 명이 위로를 건네 줍니다. 여러 차례 유럽을 다녀온 사람이었고, 언제나 낙관적인 힘이 넘치는 팀원입니다.
“아쉬움이 남아야 그리움이 생기고,
그래야 다시 온다. 곧 다시 오게 될 거야.”
짤막한 한마디에 많은 게 괜찮아졌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든 오후, 눈에 띈 기념품 샵에 들어가 다음 년도 다이어리를 샀습니다. 그리고 1년 후 같은 7월에 동그랗게 원을 몇 바퀴 그려넣고, 별도 달아 두었습니다. 내년, 다시 찾아올 유럽을 기대한다고 말입니다. 첫 장에 조그마한 메모를 적었습니다.
꼭 다시 보자, 유럽.
모든 여정의 마지막에 레미제라블 뮤지컬 극장을 찾았습니다. 일정이 엇갈리며 오후 시간이 비어 버린 덕분에,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원작이 된 공연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당일이라 몇 남지 않은 구석진 자리에, 심지어 팀원들과 떨어져서 관람해야 했지만 황홀했습니다. 한국에서 수 십 번을 보고, 모든 곡을 외울 정도로 사랑하는 작품이었습니다.
불이 꺼지고 공연이 시작되자 눈앞에 모든 게
사라지고 오롯이 무대만 빛났습니다.
시작 전 시야를 가릴까 우려했던 앞 사람의 큰 키는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이 허밍으로 시작하는 오프닝 곡에 흡입되듯 빠져들었습니다. 빠르게 전환되는 장면은 놀랍도록 동명의 영화를 닮아 있었고, 레미제라블 전용극장 답게 무대 장치, 연출 기법, 장면이 뛰어난 구성으로 물리적 한계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있었습니다. 협소한 공간임에도 관중을 압도하는 스케일과 현장감이 감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바로 전날까지 노트북 화면 속 장면과 이어폰 속 노래가 현실이 되어 눈 앞에 펼쳐지는 감동이라뇨. 수 년간 사랑했던 장면이 지나갈 때마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자꾸만 ‘여기가 현실이 아니면 어떡하지’, ‘정말 내가 여기에 있는 건가’와 같이 행복한 의구심과 걱정이 절로 들었습니다. 배우들이 다 함께 합창하는 엔딩 곡에서는 높아지는 피크와 음량에 맞춰 온 몸에 소름이 돋았고, 벅찬 감동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습니다.
커튼콜이 시작되는 순간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전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힘차게 손이 부셔져라 박수를 쳤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감동을 혼자만 받은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라는 게 이런 걸까요? 커다란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환호와 갈채에 감격이 배가 되었습니다. 옆 자리 사람과 함께 울고 웃었고, 무대의 감명을 공유할 때. 그 때 서야 제가 정말로 그 곳에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꿈이 아니었습니다.
극장을 나와 팀원을 기다리며, 풀린 신발끈을 묶기 위해 잠시 고개를 숙였을 때입니다. 옆 자리에 앉았던 독일인 노부부가 다가와 인사를 하더니, ‘have a safety journey’라는 말을 건네 줍니다. 비록 초면이지만 공연 내내 함께 울고 웃고, 휴게 시간에 작품에 대한 기대와 감동을 함께 나눈 사이였습니다. 이 뮤지컬을 관람하기 위해 영국에 왔고, 딱 하루만 묵고 돌아간다던 이들. 서로 얼굴만 알 뿐 이름 한 자,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사이였지만 순간을 함께한 인연이었습니다. 서로의 기억 한 편에 강렬하게 남을 하루를 더없이 따뜻하게 해준 분들에게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영국의 마지막 날이 저물고 있었습니다.
*** 브런치 독자분들을 위한 글
- 1년도 넘게 적은 글들을 매주 한차례씩 전달드립니다.
- 한 주를 또 치열하게 살아냈을 매주 토요일 밤, 지나온 발자취와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
- 여러분의 삶에 자그마한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