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는 천천히
저희 반에 수학을 잘하는 학생이 있어요. 어느 정도냐면 제가 2시간이나 고민해서 푼 문제를 그 학생은 바로 풀어버렸다니까요. 그걸 보고 쟤는 뭐 하는 애인가 싶었죠. 어제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첫 모의고사를 봤어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 친구가 제 앞자리였어요. 수학 시험 시간이 한 60분 정도 흘렀을까요? 갑자기 엎드려 자길래 벌써 포기하나 싶어 피식 웃었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30문제를 다 풀어서 할 일이 없어 잔 거였대요. 와 어이없어;; 심지어 시험 끝나기 10분 전에 갑자기 일어나서 뭔가 싶었는데 자신이 푼 문제를 다시 훑어본 거였다고 해요. 그리고 그 학생은 100점 맞았어요.
선생님은 제 성적이 궁금하시겠죠? 음.. 결과는 나름 만족스러웠어요. 그런데 주변 친구들의 말이 너무 거슬리는 거 있죠? 실수를 해서 2등급이 되어 투덜대는 친구를 봤어요. 1등급인데 점수가 마음에 안 든다는 친구도 있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괜히 속상해요. 남들보다 한참 뒤처질까 두려워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해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할 거란 두려움. 선생님이 이런 날 보고 실망할 거란 두려움. 머릿속에 온갖 나쁜 상상이 파도처럼 덮쳤어요.
그런 절 보고 어제 선생님이 제게 말씀하셨죠. 만약 세상이 마라톤 경주와 같다면 세상은 다양한 속력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라고. 두 다리로 걷는 사람, 빨리 달리는 사람, 휠체어를 타는 사람, 목발을 짚은 사람까지. 모두가 각자의 속력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이죠. 그런데 나보다 빨리 달리는 사람의 속력에 너무 집중하면 두려움이 생긴다고 했어요. 뒤처질까 봐 생기는 두려움이죠.
다른 사람의 속력에만 집중하면 내가 어떻게 달리고 있는지 볼 수 없다고 하셨죠? 내 속력은 뒤죽박죽 엉망이 되고 그러다 결국 내 페이스만 망가진다고요. 꾸준히 달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주저앉아 버리겠다는 생각마저 든다고 했는데 정말 맞는 말이에요. 어제 하루 종일 이불속에 틀어박혀 있었거든요.
밥을 정말 느리게 먹는 친구가 있어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나 싶을 텐데 일단 들어보세요. 진짜 쉬는 시간이 아까워 죽겠는데 밥 먹는데 무려 20분이나 써요. 그런다고 그 친구를 재촉하지는 않아요. 그러다 체라도 하면 큰일 나잖아요? 점심시간마다 그 친구의 속력을 경험해요. 뭐 나름 괜찮았어요. 소화도 잘되는 거 같고. 그러다 문득 깨달았어요. 빨리 달릴 수 없다면 내 속력을 조금 늦추는 건 가능하겠다고 말이죠.
선생님 전 결심했어요. 이대로 털썩 주저앉지는 않겠다고요. 내가 가진 속력대로 꾸준히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결승선에 다다를 수 있을 테니 말이죠. 그리고 이왕이면 나 혼자 빨리 가기보다 친구와 함께 멀리 가는 편을 선택할래요. 그러면 빨리 달려야 한다고 강요하는 세상이 언젠가 서로의 속력을 존중해주는 곳으로 바뀔지도 모르죠. 전 그렇게 믿고 살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