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누구나 들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감정을 뛰어넘는 사이들도 있다.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오랜 시간 함께 정들어온 사이들.
내가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라고 할지라도 아끼는 사람의 좋은 소식에 같이 기뻤다.
오히려 그 소식 덕분에 현재 좋지 못한 기분이 있다면 완화되기도 했다.
상대도 나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건 큰 착각이었다.
안타깝게도 사돈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말을 뛰어넘을 만한 사이임에도
축하해 줄 만한 이에게 축하받지 못한 사돈의 상처보다,
사돈 때문에 배 아픈 상처를 더 알아봐 주는 곳에 나는 속해있었다.
아주 오래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축복받아 마땅한 날. 내게도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식 알린 순간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며 많이 축하해 줄 사람이라고 어릴 때부터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좋은 얘기도 한두 번이지.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애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 말로 나의 그 믿고 싶지 않았던 느낌들이 사실이라고 증명된 것 같았고 그동안 함께한 추억들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그 애에게 어지간히 자랑만 했나 보다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가 좋지 못한 일을 겪고 있을 때 많은 시간 함께 하며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고 눈물까지 보이던 나였다
그도 좋은 일은 뭐든 이야기하는 편이었고 그때마다 진심으로 같이 기뻐해줬었다.
기쁜 일과 슬픈 일 모두
동일한 시기에 겪었다면
그런 말을 안 들을 수 있었을까.
'좋은 얘기도 한두 번이지.'
한 명의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이해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오랜 시간, 일거수일투족 나눈 사이로서는 충격적이었고 그 상처는 끝없을 것처럼 오래 지속됐다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구나.나는 본인이 힘들 때 듣기 싫은 행복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심리적 방해꾼이었구나.'
내 말끝에 “그건 너고”라는 말을 자주 덧붙였었다. 내 삶은 내 삶, 서로의 생각차의 당연함에 대한 말.
그렇게 ‘너는 너 나는 나’를 강조했었는데 왜 유독 내 잘 된 소식엔 ‘너는 너 나는 나’로 분리가 안 돼서
기분이 안 좋았던 걸까.
이X보단 파X이 나아.
아니다 싶으면 도망쳐
그날을 준비하기 위해 신경 쓸 게 여럿이라는 내 엄살에 그가 했던 말.
지금의 남편과 사이가 좋으면 좋았지 관계적인 부분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던 내게
그저 그날의 준비가 힘들다는 말 끝에 기다렸다는 듯 나온 말.
한 사람의 축복받을 일에 과연 긍정적 단어보다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단어들이 먼저 나오기 쉬울까.
출근길, 지하철을 기다리던 나는 그애의 말을 보자마자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수많은 더 좋은 말들이 있었음에도 보편적으로 할 수 있는 말로, 장난으로 넘겨야 했다.
보편적이며 흔히 할 수 있는 말.
이것이 상대에게 상처를 줬을 때 조차 얼마나 아무렇지 않아 보일 수 있는가.
중요한 건 나의 불편함이 온전히 이해받을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악감정으로 한 말이 아니라...
의아한 말투와 표정에 나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되곤 했다.
분명 상처 받았는데 상대를 무안하게 만든 장본인이 되어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넓은 아량으로 '그럴 수도 있지.' 해주고
안 맞는 부분은 '틀린 게 아닌 다름'으로 이해함은
나또한 상대에게 그만큼 소중히 대해지고 있을 때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이미 지나간 사람은 지나간 사람이다.
그 사람이 지나가며 분 바람 덕분에 주변이 더 확실해진 면도 있다.
바람이 불면 낙엽처럼 훨훨 멀어질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게 됐다.
사람의 마음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나를 얼마나 아끼고 응원하는지에 대한 상대방 마음까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 상처받은 내 마음 그 자체를 인정해 주고 스스로 도닥여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