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자기 객관화가 필수
지금 시대는 '만인작가시대'라고 부를 만큼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많다. 블로그를 비롯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내 글'을 소개할 공간과 플랫폼이 많아진 이유가 큰 듯하다.
사실 전문 직업 작가가 아니라면 '짧은 글'을 쓰는 실력은 비슷해 보인다. 여기에 매일 글 쓰는 것을 습관화한다면 좀 더 긴 글을 매끄럽게 잘 쓸 수 있다고 본다. '너무 좋은 글'을 첫방에 쓰려기보다 매일매일 꾸준하게 써 나가는 것을 조언하곤 한다. 이는 책 편집자나 작가들의 조언이기도 하다. 글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라고. 머리가 재능을 뜻한다면 엉덩이는 '꾸준한 성실성'을 뜻한다.
실제 젊은 시절 제아무리 날고 길었던 사람도 오랫동안 글을 안 쓰다가 쓰려면 힘들다. 치열하게 매일 기사를 쓰던 펜기자도 데스크가 되어 눌러앉게 되면 글 쓰는 것을 힘들어한다. 후배 기자들의 글을 봐주고 지적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보니 정작 자신의 글을 쓰는 감을 잊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편은 후배들에게 조언했던 것을 대충 정리해보려고 한다. 내 글 또한 결점 투성이인지라 누군가를 지적하고 혼내는 게 온당하지 않다고 보지만, 그래도 10년 넘게 꼬박 글을 써왔던 입장에서 하는 팁이라고 봐주시면 좋을 듯.
1. 첫 문장에 신경을 써라.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글쓰기를 시작할 때 '첫 문장 쓰기'가 가장 어렵다. 내 글의 '첫인상'과 같기 때문이다.
후배들한테 얘기하는 것 중 하나는 "첫 문장을 '광고 카피라이트' 만든다는 식으로 생각하라"이다. 함축적이면서도 눈길이 갈 수 있는 문장을 만들라는 주문인 셈이다. 무척이나 어려운 미션이지만 15초 분량의 방송 CF가 첫 문장에 무척이나 신경을 쓴다는 점을 생각하면 필요한 부분이긴 하다.
옛적 기자 선배 한 명은 "첫 문장을 읽고 두 번째 문장이 읽고 싶어지고, 다시 세 번째 문장이 읽고 싶어 진다면 성공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첫 문장은 어떻게 써야 할까. 주술 관계에 맞춰 최대한 단순하게 쓰면 좋다. 많은 기자 선배들이 추천해 준 '첫 문장의 진수'는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 첫 부분이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 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김훈 선생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고 할지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라고 할지 심히 고민했다고 한다. 긴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무심하게 꽃이 피었다는 무심함을 보이려고 했던 것 같다. 이순신 장군이 봤을 장면을 작가적 시각에서 상상해 쓴 문장인 듯하다.
이런 고급진 문장을 우리가 쓰게 될 일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평범한 우리라고 한다면 시간과 장소, 사건이 한 문장에게 들어가도록 하면 '괜찮은 첫 문장'이 된다. 전형적인 두괄식(주제가 앞부분에 명확하게 드러나는 글) 글이면서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형식이다.
혹 미괄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뒷부분에 드러낸다고 해도 첫 문장은 주제의식과 '유관'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논증하려면 최소한의 단서라도 첫 문장에 남겨놓아 독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해야 한다는 의미다.
2. 글 쓰는 것과 지식 자랑은 별개다
옛적 조선일보 선배가 내가 포함된 막냉이들의 글을 보고 혀를 끌끌 찬 적이 있다. '나 이만큼 많이 알아요'라고 뽐내려고 기자 하냐고.
기자 초년생이 많이 저지르는 실수인데, 현장에 가면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와 의견을 듣게 된다. 정보의 비대칭 면에서 봤을 때 회사에 앉아 있는 데스크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개중에는 자기가 '이만큼 많이 알아냈으니 봐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글이 있다.
또 한 번은 참으로 답답한 후배를 만나 고생한 적이 있다. 고집까지 센 이 친구는 '독자들이 알아야 한다'면서 이것저것 내용을 가져다 붙이고 나열했다. 평소 대화에도 '나 많이 알고 있다'라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어필하려고 했던 친구였다. 본인의 성향이 그가 쓴 글에도 고스란히 나타난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게 있다. 우리는 우리가 본 사실을 전부, 100% 객관화해서 담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다못해 사진이나 동영상도 찍고 있는 사람의 시야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쓰는 글은 '우리가 창조하는 또 다른 세계'다. 그 안에서 나만의 흐름을 보여줘야 한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우리 바깥 세계의 정보를 100% 담기 어렵고, 우리가 보고 느끼고 쓴 글은 '나'라는 존재를 통해 가공된 또 다른 현실이라는 얘기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론할 수 있다. "내가 창조하는 세계인데, 내 마음대로 쓰면 안돼요?"라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다. 내가 쓴 글은 '내가 창조하는 세계'로 독자를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그 독자가 무슨 내용인지 헤매고 맥을 못 짚는다면 무슨 소용일까? 나는 보여주고 싶은 세계가 이렇게 많은데, 독자가 그 세계를 보지 못하고 이해 못 한다면 소용이 없는 셈이다.
우리는 글을 쓰는 데 있어 독자에게 친절해야 하고, 독자가 해멜 수 있을 만한 군더더기나 주제와 상관없는 내용이나 단락은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맥락에 맞춰 스토리가 이어져야 한다는 얘기다. 기승전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목과 첫 문장과 일치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래서 앞서 '첫 문장 쓰기가 어렵다'라고 얘기한 것이고.
3. 다 쓴 글은 좀 묵혔다가 다시 보자
'이불킥을 찬다'라는 말이 있다. 낮에 있었던 민망했던 일이나 후회할 만한 사건이 자기 전 생각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 정서가 차분해지면서 자기 객관화가 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글을 쓰다 보면 막 흥분해서 일필휘지로 쓸 때가 많다. 몰입이 주는 묘미이지만, 내 생각에만 집중해 있다 보니,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
또 사람은 자기에 관대할 수밖에 없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던가, 모든 내 관절은 나를 향해서 굽어진다. 자기가 쓴 글에 대한 자기 객관화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이럴 때는 잠시 바람을 쐬고 온다거나, 다른 일을 하면서 주의를 환기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아닌 '제삼자의 시각'으로 보고 내가 쓴 글을 고치고 또 고치는 것이다.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들어봤을 무라카미 하루키는 초고를 쓰고 처음부터 다시 고쳐가는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에게 평을 듣는다고 한다. 그 과정을 거치다 보면 자기도 얼굴이 화끈해질 때가 있다고 한다. '내가 이렇게 썼다니...'라면서.
사실 작가들을 보면 '쓰는 시간'보다 '고치는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한다. 고치고 수정하는데 더 많은 정성을 기울이기도 한다. 실제 많이 고칠수록 글의 완성도는 높아진다. 세상에 완벽한 글은 없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글 잘 쓰는 사람'은 '글을 잘 고치는 사람'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