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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신 Nov 2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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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태식이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진 건 여자와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30분가량 지났을 때였다. 물 마른 계곡엔 갈잎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 태식은 공벌레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가만히 있었다.

  -제발 부탁이야, 그만해, 그만하라고.

  태식이 애원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누가 이기나 해 보자고. 이번만큼은 절대로 지지 않을 거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포가 동시에 내지르는 아우성이 벌집을 들쑤신 것 마냥 우웅 울렸다. 끊임없이 태식에게 시비를 걸다가 마침내 태식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친 건 다름 아닌 태식의 몸이었다.

  “태식 씨 괜찮아요?”

  여자가 비탈을 내려오는지 낙엽 밟히는 소리가 바작바작 났다.

 태식은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지가 섰소.”라고 근엄하게 말할 수도 없고, 남성의 뿌리라느니 남자의 상징이라느니 하는 말로 에둘러 표현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산에 오르기 전부터 태식의 성기는 우뚝 서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산을 오르리라는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져 화가 났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딱딱해진 페니스를 꽉 잡고 걷는 거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낙엽 진 비탈에 처박혀 있는 동안에도 발기 상태는 유지되었다. 쾌락이 문제가 아니었다.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다친 데 없느냐고 묻는 여자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지만, 태식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문 채 잠자코 있었다. 자신의 몸을 자신의 의지로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수긍하기 어려웠다. 어쩌자고 몸이란 녀석이, 엄밀히 말하자면 자지가 이다지도 제멋대로 구는 것일까? 고등학교 삼학년 때 새벽마다 불끈 서 있는 물건이 거추장스러워서 확 잘라버릴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공부해야 하는데 어쩌란 말이야 싶어서 짜증이 났다. 그때는 활발한 생명 현상이라고 이해했으나 오십이 지난 지금은 마땅한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몸의 반역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만 보면, 아니 생각만 해도 머리를 쳐드는 녀석 때문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일상에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

  -미친 거 아냐? 제발 빨리 죽어.

  몸에게 아니 자지에게 다시 한번 애원했다. 소용이 없었다. 태식을 골탕 먹이기로 작정이라도 한 양 더욱더 단단해졌다. 창피하기도 하고, 화도 나고, 아프기도 해서 몸이 공중분해라도 되었으면 싶었다. 육체의 통증보다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본능 때문에 더 화가 났다. 통증의 강도가 강해지는데도 피는 모두 그곳으로만 몰렸다.     

  태식은 돌연사한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갔을 때는 아직 빈소가 차려지기도 전이었다. 망연자실해서 복도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로 그때 또각또각 바닥을 때리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성마른 걸음으로 급히 다가오는 여자가 있었다. 친구의 아내도 아니고 누이도 아니며 직원도 아니었다. 그녀는 당혹과 공포가 뒤섞인 눈빛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태식은 여자에게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거 같았다.

  “아직 빈소가 차려지지 않았으니 여기 앉아서 잠시 기다리시죠.”

  태식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여자가 빈소를 기웃거렸다. 텅 빈 빈소에서 돌아선 여자가 엉덩이를 소파 끝에 걸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았다. 태식은 여자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는지 의아했다. 잠시 뒤에 빈소가 차려지고 고인의 이름과 상주의 이름이 벽에 붙었다. 상주는 아직 오지 않았다. 상주 없는 빈소에 제일 먼저 국화꽃을 놓은 사람은 태식이었고 여자가 태식의 뒤를 이었다. 얌전하게 절하는 여자를 훔쳐보는 태식의 심장이 빨리 뛰었다. 비보에 놀라서 달려올 때와는 다른 두근거림이었다.

  조문한 이후에도 그녀는 돌아가지 않았다. 밤을 새울 모양이었다. 접객실 모퉁이에 쪼그리고 누운 그녀에게 친구 회사의 남자 직원이 점퍼를 벗어서 덮어 주었다. 직원들 모두 그녀를 잘 안다는 느낌이 들었다. 태식에게 친구의 죽음을 전한 사람은 친구의 비서였다. 사무실 천장에 있는 완강기에 목을 매 자살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도무지 연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심장마비였다.

  관이 영구차에 실릴 때 그녀는 연도에 서서 울었다. 화장장에서도 자리를 뜨지 않았고, 추모관에서 마지막 인사를 할 때도 직원들 사이에 섞여 절을 했다. 태식은 여자와 친구가 깊은 관계였음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연인이었나?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외도할 녀석은 아니었다. 도대체 두 사람은 무슨 관계였을까? 추모관에 유골을 안치하고 주차장까지 내려가는 동안 그녀 곁에 서서 걸었다.

  “차를 가지고 오시지 않았다면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장례 기관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고 왔다는 사실을 태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감정이 모두 사라진 얼굴로 태식의 차에 오른 그녀는 목적지를 말하고 이내 잠이 들었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으니 잠이 쏟아지겠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도시는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잠에서 깬 그녀가 대로변에서 내려 달라고 말했다.

  “저, 명함 있으면 한 장 주십시오.”

  가방을 뒤적이던 여자가 무심한 표정으로 명함을 건넸다. 명함에는 펜으로 그린 여자의 얼굴 옆에 이름과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만 적혀 있었다. 직업이나 직장을 유추할 근거가 전혀 없었다. 고맙다거나 잘 가라거나 하는 인사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여자가 멀어져 갔다.

  삼우제 날 오전에 태식은 여자에게 전화했다. 다짜고짜 추모관에 갈 예정이니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그런 제안을 할 사람이 태식밖에 없다는 듯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흐른 후 가겠다고 말했다.

  “지난번 내려드렸던 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추모관으로 가는 내내 그녀는 말이 없었다. 태식도 울적한 기분이 들어 말문이 쉬이 열리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를 보기 위함인가, 친구를 보기 위함인가. 자문해 보았지만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유골함 앞에는 손때 묻은 시집과 하모니카와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 모습에 가슴이 저렸다.

  “할 말 있으면 다 하세요.”

  태식은 무뚝뚝하게 말한 뒤 자리를 비켜 주었다. 친구와 대면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십 분 정도 지나서 그녀가 나왔다. 오래오래 애달픈 사연을 나눌 줄 알았는데 의외였

 다. 눈물의 흔적은 남아 있었으나 표정은 담담했다. 태식은 어쩐지 멋쩍어서 뒷머리를 긁었다. 곧바로 도시로 들어가기에는 뭔가 마땅찮았다. 그녀가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았다. 발길을 산 쪽으로 돌렸다. 그녀가 말없이 태식의 뒤를 따랐다. 

  원래 묘지였던 곳에 추모관이라는 이름의 납골당을 새로 지은 모양이었다. 산등성이까지 온통 무덤이었다. 얼핏 보아도 수 천 기가 넘을 거 같았다. 귀퉁이가 깨져 나간 채 비스듬히 기울어진 돌이 비석 본래의 모습을 잃고 서 있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글자는 一八九八年. 백 년 하고도 이십 년이 더 지났으니 후손의 발길이 완전히 끊겼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장례란 산 자들을 위한 향연이라는 깨달음을 마모된 비석에서 얻었다. 죽은 자에게 형식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한 줌 흙이 되었는지 한 줌 재가 되었는지 죽은 자가 알 방법이 없지 않은가.

  세대를 넘나드는 주검이 자리하고 있는 이 장소가 이상하게 친근하게 느껴졌다. 천만 명이 어깨를 부딪치며 살아가는 서울이라는 복잡한 공간에서 한 남자가 세상과 이별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누가 타인의 죽음에 관심을 가질까?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잠시도 쉬지 않고 일했던 친구.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쾌락도 추구하지 않았던 친구의 모습이 이 시대 남자들의 슬픈 자화상 같았다. 삶을 즐기던 모습이 기억난다면 이리 슬프지 않을 텐데…. 그러고 보니 태식도 마음속 깊은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고 살았다. 남자는 눈물을 보이면 안 되고 감상에 젖어서도 안 된다고 배우며 자란 탓이다.

  무덤 사이를 지나는 동안 태식은 죽음과 자신과 친구에 대해 생각하느라 그녀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사방에 널린 봉분 하나하나마다 각각의 사연이 있을 터였다. 묘지가 끝나는 곳에 홀로 우뚝 솟아있는 추모관 건물은 경건하면서도 정겨운 느낌을 주는 아담한 봉분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햇살 탓인지 그녀의 얼굴이 조금 밝아진 거 같았다.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 그녀가 친구의 흔적을 지우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몸에 힘이 빠지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바람에 실려 오는 그녀의 체취는 이성을 마비시킬 만큼 묘한 향기를 지니고 있었다. 몸이 먼저 알아채고 꿈틀거렸다. 주검의 흔적이 겹겹이 쌓인 묘지에서 슬퍼서 더 아름다운 여인을 태식의 몸이 원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이런 순간에 여인을 품고 싶어 하다니! 제정신인가? 태식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실소하면서도 태식의 눈은 앉을만한 자리를 찾고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잘 가꾸어 놓은 무덤이 보였다. 수령이 꽤 되어 보이는 황금편백이 봉분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고 상석 앞의 잔디도 잘 다듬어져 있었다. 태식은 무심을 가장하며 봉분 앞으로 갔다. 코트를 벗어서 바닥에 펼쳐 놓고 잠시 쉬어가자고 말하며 펼쳐 놓은 옷 위를 가리켰다. 여자는 태식과 시선을 맞추지 않고 얌전히 앉았다. 한낮이라지만 11월의 바람은 제법 차가웠다. 여자의 처연한 눈빛이 태식의 가슴을 아프게 꿰뚫고 지나갔다. 

  그녀가 하루라도 빨리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친구와 그녀의 관계를 모른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태식이 음악 폴더를 열었다. 조수미가 부른 ‘기차는 8시에 떠나네’가 제일 위에 있었다. 곱고 청아하지만 슬픈 조수미의 목소리가 상실의 아픔을 겪는 여인이나 묘지와 잘 어울릴 거 같았다. 검지로 제목을 눌렀다.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가사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는데 일부러 선택한 양 11월이 영원히 기억에 남을 거라고 노래하고 있었다.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저세상으로 간 친구는 영원히 오지 못할 것이다. 그녀만 이곳에 다시 오게 되겠지.     

  “요조숙녀가 되고 싶었나 봐요.”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태식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기가 선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랐어요.”

  행복하기를 바랐다니? 행복하게 해 주지 못했어요. 그래서 울고 있어요, 라고 말할 줄 알았다. 도대체 둘은 어떤 관계였을까. 그녀의 망연한 눈빛이 하늘 끝 어딘가에 가 있다. 친구보다 어려 보인다는 느낌 뿐, 몇 살인지, 무슨 일을 하며 사는지, 친구와 어떤 사이였는지,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있는지, 아는 게 없다. 모든 게 궁금했다. 물어보고 싶지만, 묘지라는 장소가 주는 숙연함이 호기심을 억눌렀다.     

  추모관에서 돌아온 이후 태식은 처음으로 남자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수컷이라 불리는 동물의 참된 삶은 수억 단위의 정자를 매일 생산해서 상대에 상관없이 여기저기 흩뿌리는 거라고 한다.       태식이라고 아내 아닌 여자에게 마음을 뺏긴 적이 없었겠는가. 세어보진 않았으나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찬이나 예의를 갖춘 말로 호감을 전달하는 정도에 그칠 수 있었던 건 이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성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녀를 만나면 몸이 제멋대로 꿈틀거리며 이성을 비웃었다. 

  태식의 몸이 마음을 불러들였다. 육신이 일으킨 파동이 감성을 건드렸고, 마침내 청춘 시절보다 더 설레고 그리운 감정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꿈속에서조차 그녀가 나타났다. 사랑이 떠나가면 그냥 두시게 마음이 떠나면 몸도 가야 하네. 가황이라 불리는 가수의 노랫말과는 반대되는 현상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태식에게는 노후를 어떻게 보낼지, 전원 생활을 할지 말지, 반드시 오고야 말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 맞이할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자식들에게 사전 증여하는 게 좋을지 등의 소박한 고민만 있었다. 일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중산층으로서 안락한 생활을 누리며 살았다. 학창 시절 사귀던 여자도 여러 명 있었고 아내와도 오랜 기간 교제 후 결혼했다. 매번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과는 확연히 달랐다.

  태식이 아는 한 친구는 연애 경험 없이 처음 맞선 본 여자와 결혼했다. 룸살롱에 가더라도 일찍 자리를 떠났고 술에 취해 나누는 음담패설에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랬던 친구의 마지막 길을 지킨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몸의 속삭임을 무시하기 위해 이성이 만들어낸 핑계는 다름 아닌 의구심이었다. 나는 그냥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할 뿐이야. 의구심이 부여한 당위성에 기대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생맥주 한잔하지 않겠소?

  긴 설렘과 달리 짧은 문자였다. 태식은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매시간 메시지 함을 확인했다.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좋아요, 라는 더 짧은 회신이 왔다. 어디서 만날지 미리 생각해 두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약도를 보냈다.

  술을 마시는 동안 태식은 여자의 표정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눈언저리의 변화가 포착된다. 눈웃음도 아닌 근육의 움직임에 안도한다. 그녀가 매일 울고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녀가 울지 않고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시간을 앞당기고 싶다는 욕망이 용암처럼 솟구쳐 올랐다. 그녀가 울지 않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었다. 한 번만 손을 잡아주면, 한 번만 꼭 껴안고 등을 다독여주면, 한 번만 입 맞춰 주면, 한 번만 안아 주면 영원히 울지 않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녀가 빠르게 술잔을 비운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태식은 벌써 취했다. 친구의 부재와 상관없이 세상은 잘 굴러갈 것이다. 살아남은 자는 생명을 이어가야 한다. 죽음의 여신이 새로운 희생자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따라 죽으면 안 된다…. 횡설수설한다. 혀가 꼬여 발음이 분명하지 않다. 에이 창피하게, 내가 왜 이러지?

  “그만 집에 갑시다.”

  서둘러 계산을 한다. 먼저 나가버린 그녀가 지하철역을 향해 가고 있다. 홀로 걸어가는 그녀의 어깨가 너무 작지 않은가? 비틀거리며 잰걸음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는다.

  “그 사람은 내 손을 잡은 적이 없었는데….”

  “나는 잡을 거요.”

  친구는 적어도 이 여인에게 육체적으론 무심했던 것 같다. 아니면 태식보다 더 이성적이었거나. 그녀가 잡힌 손을 빼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기며 코트 주머니 속에 넣는다. 인간의 체온이 이다지도 감동을 줄 수 있나. 태식은 미세하게 변하는 그녀의 체온에 온 정신을 모은다. 걸음걸이가 변하면 손으로 전달되는 체온도 동시에 변한다. 분명한 건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손이 점점 따뜻해진다는 사실이다. 침울했던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행여 그녀의 체온을 잃어버릴세라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더듬는다. 손을 잡고 걷는 이 행위조차도 태식이 원하는 만큼 계속할 수가 없다. 개찰구 앞에서 아쉬워하며 손을 놓고 그녀를 보낸다. 그녀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계단을 내려간다.

  태식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거 같았다. 언제쯤 사업을 정리하나, 누구에게 물려주나, 고민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은퇴나 전원생활의 꿈은 사라지고 더 오래 더 열심히 일하기로 했다. 피가 온몸을 활기차게 돈다고 느낀 건 건조하고 각질이 많은 피부가 부드러운 분홍색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세포 하나하나가 이제 막 태어난 듯했다. 우주인처럼 공중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연애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목소리마저 젊어졌다며 회춘한 모양이라고 놀리기까지 했다.     

  사할린으로 놀러 오라는 초등학교 동창의 전화를 받는 순간, 태식은 그녀를 떠올렸다. 흰색 이외에 다른 색은 없는 완전한 설국으로 여행을 오란다. 지난여름에는 헬리콥터를 타고 사냥하는 재미가 끝내준다며 꼬드기더니만. 태식은 재미를 위해 생명을 죽이기 싫었다.

  사할린으로 간 지 이십 년이 된 그는 개미굴처럼 복닥거리는 서울이 싫다고 했다. 업무차 서울에 오면 볼일만 보고 얼른 돌아갔다. 수산업과 무역업을 하다가 한국식 아파트를 지어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상가와 정원과 어린이 놀이터가 있는 아파트 단지를 사할린에 처음 조성했는데 주차공간도 분양한다는 말에 태식은 깜짝 놀랐다. 일 세대 일 주차공간이 아니라 추가로 돈을 내야 한다는 거다. 지하 3층까지 주차장을 지어서 입주민에게 팔고 남은 자리는 동네 사람에게 판다고 했다. 겨울에는 매일 눈이 오니 지하 주차장 수요가 높단다. 꿩 먹고 알 먹는다더니.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었다. 사할린에서 생산되는 건축 자재가 없어서 모두 한국산을 썼다. 몇몇 업자를 소개해 주었더니 은혜를 갚아야 한다면서 보채다시피 계속 전화했다.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온 세상이 얼어붙은 곳, 끊임없이 눈이 내리는 곳, 흰색만 남기고 나머지 색이 모두 사라진 곳. 그런 곳에서라면 일상에서 벗어나도 되지 않을까. 내 발자국은 자취 없이 지워질 테고, 길은 언제나 새로워질 테니까.

  “여자를 데리고 가도 돼?”

  “되고말고. 펜트하우스 비워 줄게. 술도 음식도 채워 놓고.”

  녀석은 놀라지도 않았고 놀리지도 않았다.

  문제는 그녀였다. 그녀는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예와 의를 다해 친구가 가는 길을 끝까지 지켰다. 비겁하거나 소심한 사람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다. 품위와 용기를 겸비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내면이 강한 사람만이 그런 처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만 건드려도 전체가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는 태식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태식의 어깨 너머에 시선을 두었다. 시선 한 번 마주쳐 주지 않는 그녀라서 더 애달팠다. 반드시 함께 가고 싶었다. 그녀를 감싸고 있는 비탄의 음울한 그림자를 벗겨내고 싶었다. 어떻게 데리고 가지?     

  곧 착륙할 예정이니 안전벨트를 매라는 기내방송이 나왔다. 새하얀 입자가 창을 가렸다. 영원히 구름 속에 갇히는 건 아닌가 싶을 만큼 운층은 두터웠다. 구름의 장막 아래로 내려오자 밝게 빛나는 새하얀 세상이 나타났다. 나무도 숲도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흰색 외에 다른 색은 없다던 동창의 말은 참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꿀벌이 떼지어 날아오듯 흐벅진 눈송이가 쏟아져 내렸다. 기세를 더해가는 눈발 덕분에 허공이라는 단어는 의미를 잃었다. 작은 여백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조밀하게 내리는 눈이 무색 캔버스를 흰색으로 채웠다. 한낮에도 자동차의 전조등을 켜야 하는 이곳은 북위 46도에 있는 유즈노사할린스크다. 일 년의 반이 겨울이고, 겨우내 눈이 내리며, 바다조차 꽝꽝 얼어붙는 곳. 동토의 왕국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그런 곳이다. 온통 흰색뿐이라 그야말로 설국 그 자체였다. 순백의 세상처럼 마음이 하얘진다면 어떤 그림이라도 다시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서울의 사 분의 일 만한데 인구는 이십만 명입니다. 서울이 여기보다 13배나 밀도가 높죠. 서울에 가면 정신이 없어요. 그런데 저기,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됩니까?”

  동창 녀석이 룸미러를 흘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나타샤라고 불러주세요.”

  그녀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태식은 혹시라도 그녀가 불쾌하게 여기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는데 다행이었다. 그녀가 순순히 사할린 여행을 허락해서 놀랐고, 처음 만나는 사람의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대답해서 또 놀랐다.

  “세례명인가요? 그런 세례명도 있습니까?”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뭐 이런 시는 있죠. 눈이 푹푹 내리니 나타샤가 될 수 밖에요.”

  그래서 그녀는 나타샤가 되었다. 속도계의 바늘이 50㎞에 가 있다.

  “눈 덮인 길을 이리 빨리 달려도 되나?”

  “사륜구동이야, 우리는 늘 이렇게 달려.”

  녀석은 심상하게 대꾸했을 뿐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숙소에는 김치찌개와 삼겹살, 쌈 채소가 준비되어 있었다. 4도부터 9도까지 알코올 도수가 다양한 맥주와 보드카, 캐비어와 말린 청어도 있었다. 찜질방만큼은 아니었으나 대리석 바닥은 따끈따끈했고 반소매 옷만 입어도 될 정도로 더웠다.

  “석유와 천연가스 생산지라서 난방을 팍팍 하는데 내가 처음으로 바닥 난방을 도입했어. 인기 짱이야.”

  친구가 자랑 겸 늘어놓는 무용담을 들으며 술을 마셨다. 맥주에 보드카를 말아서 마시니 술술 넘어갔다. 그녀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정신을 저당잡히고 온 사람처럼 묵묵히 술만 마셨다.

  “도브라 노츠!”

  러시아 말로 밤 인사를 한 녀석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남기고 현관을 나섰다. 인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했던가? 사랑의 정석도 도전과 응전 아닐까. 그런데 나는 그녀를 사랑하나?

태식은 무조건 도전하기로 했다. 죽어버린 친구의 모습을 영원히 지우지 못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태식은 자신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놀랐다.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이 포개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으나 몸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물러나야 한다고 태식의 이성이 속삭였다. 잠시 멈칫했으나 몸이 이성을 물리쳤다. 수많은 더듬이를 곤두세운 채 탐색을 시작했다. 경직된 외부와 달리 그녀의 내면은 따뜻하고 편안했다.

  -너의 여인이야. 꼭 찾아내야 했을 오직 하나뿐인 너의 사람.

  여섯 번째 감각이 바로 그 여인이라고 알려 주었다.

  -처음부터 네 거였어.

  몸의 속삭임을 들으며 태식은 두 몸을 최대한 밀착시켰다. 귀두에 와 닿는 너무나 부드러운 그녀의 속살. 심장은 사람의 의지에 따라 뛰지 않는다. 혼자 알아서 뛴다. 이런 근육을 불수의근이라고 한다. 태식의 몸이 불수의적으로 움직였다. 그녀의 몸도 그런 거 같았다. 태식을 보지 않으려는 듯 꼭 감은 눈과 달리 그녀의 몸은 완벽하게 태식의 몸과 운율을 맞추었다. 다양한 파동으로 물결치던 그녀의 질이 점점 강력하게 조여들었다. 태식의 몸이 환희에 차 내달렸다. 의식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죽음이 목전에 닥친 듯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아랫배에 불끈 힘을 주었 다. 한 번 더, 한 번 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버텼다. 정말이지 곧 숨이 멎을 것만 같은 황홀함이 태식을 덮쳤고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열락과 함께 태식은 장렬하게 전사했다.

  습관처럼 수건으로 받치고 조심스럽게 페니스를 빼냈지만 흘러내리는 게 없었다. 아내를 비롯한 여자들은 늘 침대 바닥에 수건을 깔았다.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몸을 떼는 순간 그녀가 엎드렸다.

  “왜?”

  당황한 태식이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어깨를 돌리려 했으나

  그녀는 완강하게 엎드린 자세를 유지했다.

  “울어요?”

  태식의 물음에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할린에서 돌아온 이후에 그녀는 태식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선선히 여행을 떠날 때도, 선선히 몸을 섞을 때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녀의 마음을 읽을 방법이 없어서 애가 탔다.

  -이제 너의 일부였던 조각을 찾았잖아, 어쩔 거야?

  몸이 물었다.

  -이 빠진 동그라미는 어렵게 찾은 자신의 일부를 길가에 놓아

  둔 채 다시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되어 굴러갔다지?

  -안 돼, 그러면 안 돼.

  몸이 결연히 소리쳤다. 태식이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다투는 동안조차 온몸이 뜨거워졌다. 마법 같은 일이었다. 아니, 마법 그 자체였다.

  태식은 몸이 가진 자율성을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몸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지금, 관념으로는 육체를 속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몸이 가진 감성이 완전하다면 문제는 그 감성에 승복하지 않으려는 이성에게 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성은 감성의 선택에 강력히 반발했다. 그녀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를 이고 집으로 돌아가면 초저녁잠이 많은 아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잠든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양심의 가책이 물밀듯 밀려왔다. 아내는 왜 벌써 성생활을 할 수 없는 여자가 되었단 말인가. 그녀에 대한 갈망과 아내에 대한 자책이 뒤섞여 괴로웠다. 그런데 갈등하는 그 순간에도 그녀에 대한 상념이 끼어들었다.

  태식은 결코 바람둥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은 친구처럼 룸살롱에서 2차를 나가는 일을 금기시하지도 않았다. 몇몇 룸살롱에 태식의 단골 아가씨가 있었다. 그런데 여자는 그들 모두와 달랐다. 만족한 성생활을 위한 온갖 조언들이 한낱 헛소리에 불과했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네, 전희가 중요하네 하는 말들 말이다. 꼭 맞는 몸을 만나니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시선 한 번 마주쳐 주지 않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에게 태식의 몸이 완전히 굴복했다. 도덕이나 윤리, 이성 같은 온갖 무기는 소용이 없었다.

  철썩 소리에 눈을 떴다. 신문이 오는 소리였다. 소파에 쪼그리고 누워서 선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커피를 마시고 옷을 갈아  입었다. 아내가 아침도 안 먹고 나가느냐고 잔소리를 했지만 태식은 밥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식욕도 없었다. 바쁜 일이 있다며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도로 위에는 농밀한 갈망만이 아지랑이처럼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어차피 사라질 육신 아닌가? 감성을 억압해 이루려는 게 무언가? 자동차의 속도를 높이며 난폭하게 달렸다. 비탈진 언덕에 차를 처박고 싶기도 했고, 다리 아래 강물로 추락하고 싶기도 했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도시가 어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잘 잤을까?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점심 같이 할까요?’ 그녀가 과연 나와 점심을 먹을까? 지웠다. ‘나는 잘 자지 못했소. 밤새 어지러운 꿈에 시달렸다오. 잘 잤나요?’ 전송을 눌렀다. 그녀는 저녁이 될 때까지 읽지 않았다. 오늘 밤도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태식은 아내에게 저녁을 먹고 간다는 카톡을 보내고 혼자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직원들이 인사를 하고 하나둘 퇴근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진심으로 웃게 해 주고 싶었다. 사할린에서 그녀와 함께 지낼 생각으로 할 일을 찾아보기도 하고 집 시세도 알아보았다. 그녀와 사는 작은 집엔 방문 같은 건 없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어디서나 그녀를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서도 아내를 배신한 건 아니라고 믿었다.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화가 없었다. 돈도 아내에게 맡겼고 인간관계도 사회생활도 모두 아내가 주관했다.

  태식은 그녀를 잊기로 했다. 그녀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며 자신을 타일렀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흘렀다. 몸이 미쳐서 날뛰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지하철역 두 정거장 거리에 이르러서야 전투태세

를 갖추었다. 지금은 생각만 해도 자지가 벌떡 일어섰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심장이 빨리 뛰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도 그녀를 향해 차를 몰았고, 발걸음도 그녀를 향해 태식을 이끌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그녀를 내려주었던 거리에 와 있었다.

  잠들지 못하는 긴 밤, 너와 나의 사랑은 쉼표도 마침표도 없다. 잡념을 떨치려고 잡은 책에서 이 시구를 읽는 순간 어쩌면 이렇게 내 마음과 같을까 싶어서 눈물이 났다. 사무실 문을 잠갔다. 다 버리고 그녀와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게 내 마음인가?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그녀도 가지고 싶은 게 내 마음인가? 그녀 없이 눈 내리는 겨울과 꽃 피는 봄을 얼마나 더 맞이해야 할지, 잠 못 이루는 밤이 몇 밤이 될지 가늠할 수 없어 답답했다.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문제라며 몸을 탓했다. 섹스 중독인가? 치료를 받아야 하나? 의사는 스트레스나 고통에 직면했을 때 회피 행동으로 섹스를 선택하는 경우가 섹스 의존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 여인에 국한해서 일어나는 반응이라면 사랑이 아닐까요? 라고 되물었다. 차라리 섹스 중독이라고 하지. 치료만 받으면 된다고 말해 주지…. 사랑이라…. 사랑인가? 태식이 매일 톡을 보냈지만 그녀는 읽지 않았다. 나는 차단된 사람인가?     

  올림픽대로에 개나리와 진달래가 만발했다. 봄이 오고 있었다. 

  태식은 카톡 대신 산에 갈까요? 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뜻밖에도 가요라는 두 글자가 화면에 떴다. 할 말은 많았으나 ‘편한 신발 신고 오세요’라는 한 문장만 적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태식은 아연실색했다. 운동화는 신었으나 레깅스에 치마를 입었다. 태식은 등산복 차림이었다. 등산을 가 본 적이 없나?

  “산에 간다고 했잖아요.”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그녀가 태식의 어깨 너머를 보며 말했다.

  태식은 언젠가 가 본 적 있는 마을이 떠올랐다. 등산객들은 찾지 않는 곳이었다. 서울 근처 어디에나 산이 있으니 굳이 등산 코스를 택할 이유는 없었다. 동네 초입에 차를 세우고 오솔길을 따라 올라갔다.

  “그 사람은 늘 강아지와 단둘이 산에 간댔어요. 내게는 한 번도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죠. 산꼭대기에서 전화만 했다니까요.

쓸쓸하다면서…. 내가 먼저 가자고 말해 주길 기다렸던 걸까요?”

  그래서 얼른 따라나섰나? 한풀이라도 하려고? 에이. 속이 상했다. 그러나 태식의 몸은 속상해 할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감정의 흐름을 읽느라 신경이 곤두섰다. 벗은 몸을 보여주고 합을 맞춘 이후에도 눈길을 주지 않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제발 내 눈을 바라봐 주세요. 그리고 말해 줘요. 당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내가 당신에게 무엇이길 바라는지? 나 자신을 지탱하기가 몹시 힘이 들어요.     

  마지막 잎새마저 떠나보낸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벌리고 서 있었다. 빈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정말이지 지금은 쾌락을 위한 기대보다 아픈 것을 참기가 힘들었

다. 계속 이런 상태라면 산에서 내려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심장병 약을 먹은 환자가 발기된 성기를 부여잡고 응급실을 찾았고, 그래서 만든 약이 비아그라라더니. 자신이 딱 그 꼴이라 혀를 찼다.

  -나를 죽일 작정이야? 제발 그만해.

  -어림도 없지. 내가 왜 참아야 하는데?

  -제발 부탁이니 나 좀 살려 줘.

  -체, 잘난 이성으로 어찌해 보시든가.

  그녀가 태식의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괜찮은지 물었다. 태식은 대답 대신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그녀의 체중이 보태지자 조금 더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바닥이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두껍게 쌓인 갈잎은 생각 외로 푹신했고 몸을 숨기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태식이 그녀의 옷을 벗기려고 했을 때 처음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거부하는 대신 슬픈 눈빛으로 태식을 보았다.

  “그 사람을 구할 수도 있었는데….”

  구할 수도 있었다고? 뭔 말이지?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말을 실어 갔다.

  그녀가 치마를 걷어 올리고 태식 위에 올라앉았다. 언제 그랬 냐는 듯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짜릿하고 뜨거운 느낌이 물결치듯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몸이 부르는 환희의 송가가 마음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엄마 품에 안긴 것처럼 따뜻하고, 아늑하고, 그리고 편안했다.

  하늘색이 점점 파래졌다. 하얀 선 두 개가 짙푸른 하늘을 둘로 나누는 것을 보며 태식은 눈을 감았다. 전투기 날아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작가포럼 2021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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