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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신 Nov 27. 2021

사투

[엽편소설]

 아토는 생성과 동시에 데굴데굴 굴렀다. 

 흐름을 타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태초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 아토를 돌보는 게 나의 소명임을 저절로 알았다. 아토가 나의 존재 이유였다. 

 쉬지 않고 구른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불그스름한 빛깔의 둔덕을 만났다. 완전한 생명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 같았다. 아토를 꼭 껴안고 둔덕 속으로 깊숙하게 빠져들어 갔다. 함입되자마자 내가 수많은 돌기를 내밀어 둔덕 벽에 쐐기박듯 박은 이유는 어떤 충격에도 아토가 튕겨 나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둔덕이 젤리처럼 말랑말랑해졌다. 나는 젤리의 조직을 끌어와서 아토와 나를 감쌌다. 사방으로 뿌리를 뻗었고, 뻗어내린 뿌리를 촘촘하게 얽었다. 라케시스도 나만큼 치밀하게 운명의 실을 엮지는 못했을 거다. 정착 작업이 완벽했으므로 튼튼한 줄에 아토를 매단 후 품에서 놓아 주었다.

 아토의 몸집을 수천만 배로 키우는 일이 다음 임무였다. 아토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줄을 통해 전달해야 한다. 나는 젤리 속 영양소를 그 누구도 가져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단속했다. 게으름을 부리지도 않았고, 찰나의 휴식도 취하지 않았다. 반투명 막 너머로 보이는 아토의 몸집이 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아토를 위해서라면 어떤 고초도 견딜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는 오직 아토를 위한 존재니까.

 언젠가부터 젤리 너머에서 이런저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부드럽고 고운 한 ‘목소리’에 마음이 끌렸다. 

 “아가야, 너를 아토라고 부를게. 너는 최고의 선물이니까…….”

 의미는 몰랐으나 계속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쿵쿵쿵 소리를 처음 들었던 날, 나는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환희를 느꼈다. 아토가 진정한 생명을 얻었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사랑해, 아토야. 빨리 보고 싶어.”

 아가니, 사랑이니, 아토니 하는 말들이 더 자주 들렸다. 반복해서 듣다 보니 목소리가 내뱉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알 거 같았다.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아토가 몸을 흔들었다. 즐거워하는 아토를 보면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목소리도 아토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었다.

 문제가 생긴 건 아토가 손가락을 빨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젤리 속 흰색 육각형의 농도가 낮아졌다. 흰색 육각형이 아토의 몸을 살찌운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면밀하게 분석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사슬들이 흰색 육각형을 잡아채서 젤리 주인에게 보내고 있었다. 붉은 젤리는 이제 조금도 풍요롭지 않았다. 젤리의 주인이 아토를 버리기로 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젤리의 주인은 목소리의 주인이기도 하다. 

 아토의 숨결이 가냘프게 떨렸다. 나는 미친 듯이 사방으로 뿌리를 뻗었다. 아토를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오직 아토를 위한 존재니까.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근심이라고는 없는, 편안하고 태평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아토가 잘 자야 하니까 내가 자장가 불러줄게.”

 아토가 더이상 자라지 않고 있는데 노래가 나올까? 목소리는 아토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걸까? ‘목소리’도 나처럼 아토를 사랑한다고 믿었는데 어쩌면 아닐지도 몰랐다. 아토가 위험하다고 목소리에게 알리고 싶었으나 알릴 방도가 없었다. 

 젤리 주인이 왜 이렇게 심술을 부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선생님, 아기가 꼼짝도 하지 않아요. 우리 아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

 목소리가 떨고 있었다. 목소리도 아토를 걱정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목소리가 자기 몫의 일을 하기를 바라며 나는 사슬을 깨부수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사슬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전에 사슬의 숫자가 다시 늘어났다. 젤리의 주인이자 목소리의 주인인 그는 목소리와 젤리만 지킬 심산인지 내게 결코 지려 들지 않았다. 내가 만드는 사슬 파괴 물질보다 더 많은 양의 사슬을 내보내 흰색 육각형을 가로채 갔다. 

 젤리 주인과 나의 싸움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죽을 둥 살 둥 일했지만 내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지쳐갔다. 그냥 이대로 잠들고만 싶었다.

 “선생님, 우리 아토는 괜찮은 거죠? 어떡하면 좋아요?”

목소리가 울고 있었다.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하는 순간 엄마 몸과 아기 몸이 포도당을 놓고 치열하게 싸운답니다. 엄마도 아기도 자기만 살려고 하죠. 엄마가 이기면 유산이 되고, 아기가 이기면 임신성 당뇨가 되는 겁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아토를 얼마나 걱정하는데요.”

 “엄마의 마음과는 상관이 없어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개체의 선택일 뿐. 그러니 울지 마세요.” 

목소리가 계속 흐느꼈다. 아토를 지키는 일을 절대 멈추지 않겠다는 내 결심을 목소리에게 알리고 싶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믿음을 주고 싶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힘까지 모두 끌어모아 사슬을 깨부수는 물질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서 기관총에 장전했다. 사방으로 선회하며 쉬지 않고 난사했다. 파열음을 내며 사슬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마침내 젤리 안의 흰색 육각형이 충분해졌다. 젤리 주인이 나와의 싸움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흠, 임신성 당뇨는 태아와 산모 모두에게 위험해요.”

 “선생님 우리 아토는 무사하겠죠?”

 “그렇긴 한데……, 아토가 체중만 많이 나가고 내부 장기는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날 수 있어요. 당뇨 환자보다 더 철저하게 식이 요법을 해야 합니다.”

 혼란스러웠다. 목소리도 아토를 사랑하고 나도 아토를 사랑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그러나 오래 고민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전열을 재정비했다. 또다시 사슬이 많아지면 대포라도 쏠 작정이었다.

 나, 태반은 오직 아토를 위한 존재니까.(문학나무 2021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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