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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신 Jul 11. 2021

최후의 승자

[옆편소설]

 여자는 두어 시간 전에 남자들을 만났다. 여행을 하다가 호기심에 끌려 들어온 곳이 카지노였다.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다웠다. 카지노에 스테인드글라스라.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여자는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테이블마다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웃음소리와 탄식과 환호가 동시에 울렸다.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맨 안쪽 블랙잭 테이블에서 빈자리를 발견했다. 

 세 남자가 등을 보이며 앉아 있었다. 제일 왼쪽 남자는 헌팅캡을 쓰고 있었다. 가운데 남자는 체크무늬 남방을 입었고, 한 자리 건너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콧날이 오뚝한 딜러가 남자들이 배팅한 칩을 걷어가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체크무늬 남방과 검은 양복 사이에 앉았다. 딜러가 여자 앞에도 카드 두 장을 놓았다. 

 오픈된 딜러의 카드 한 장은 다이아몬드 에이스였다. 헌팅캡 앞에 놓인 카드는 4와 6. 헌팅캡이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히트. 카드를 받겠다는 신호였다. 새로 받은 카드는 5. 체크 남방도 히트. 여자도 히트. 검은 양복의 카드는 하트 잭과 클로버 8. 검은 양복이 손등을 흔들었다. 스테이. 딜러가 카드를 네 번째 돌렸다. 헌팅캡이 받은 카드는 8. 합이 23으로 버스트였다. 딜러가 헌팅캡의 칩을 가져갔다. 남은 사람은 세 사람. 체크 남방은 스테이 했고. 여자는 히트를 했는데 버스트가 되어 칩을 잃었다. 딜러가 엎어 놓았던 카드를 뒤집었다. 스페이드 잭이었다. ‘블랙 잭.’ 딜러가 검은 양복의 칩은 가져가지 않고 체크 남방의 칩만 가져갔다.
   “왜 저 사람 칩은 안 가져가는데요?”

 여자가 물었다.

 “저 분은 인슈어런스를 걸었어요.”

 딜러가 대답했다.

 “그게 뭔데요?”

 “딜러가 블랙잭일 경우를 대비해서 보험을 드는 겁니다. 배팅 액의 절반만큼. 보험금의 두 배를 받으니까, 본전이 되는 거지요.”

 검은 양복 대신 체크 남방이 알려주었다. 

 “21만 만들면 되는 줄 알았는데 복잡하네요.”

 여자는 계속 히트를 했고, 번번이 판이 끝나기도 전에 칩을 잃었다. 

 “계속 버스트가 나잖아요. 생각 좀 하고 하세요. 무조건 받지만 말고.”

 체크 남방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받는 건데 자꾸 21이 넘어가네요.”

 “에이, 앞에서 잘해야 하는데, 테이블을 옮기든가 해야지.”

 검은 양복이 짜증을 냈다. 

 “솜씨 없는 목수가 연장 탓을 한다더니, 자기가 잘하면 되지.”

 여자가 검은 양복을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룰도 잘 모르면서 큰 소리는, 에이, 참.”

 검은 양복이 화를 냈다. 

 “댁은 뭐, 뱃속에서부터 배워서 나왔어요?”

 여자의 언성이 높아졌다. 검은 양복의 눈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가며 인상이 험악해졌다. 딜러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손을 들자 머리를 짧게 깎은 보안요원 두 사람이 다가왔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나가 주세요.”

 “에이, 오늘 게임하긴 글렀네.”

 체크 남방이 일어서며 말했다. 

 “기분을 잡쳤으니 끗발도 안 붙겠네.”

 헌팅캡도 일어섰다. 네 사람은 게임룸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 때문에 게임도 못했으니 제가 사과주 한 잔 살게요.”

 여자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남자들은 머뭇거리며 서로 눈치를 보았다. 여자가 웃으며 한 번 더 말하자 헌팅캡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자가 앞장서서 바를 향해 걸어갔다. 바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웨이터가 네 사람 앞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여자가 이것도 인연인데 안면이나 트고 마시자고 했다. 남자들은 모두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여자는 칩을 수북이 쌓아두고 게임을 하던 남자들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게임을 정말 잘하시던데 자주 오시나 봐요?”

 여자가 웃으며 검은 양복에게 물었다. 

 “게임이야 잘 되는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는 거죠.”

 검은 양복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여자가 술잔을 헌팅캡의 잔에 부딪히며 배팅을 크게 하는 것으로 보아 돈을 제일 많이 버는 거 같다고 추켜세웠다.

 “체, 누가 돈을 잘 버는지는 대 봐야 알지.”

 체크 남방이 궁시렁거렸다. 

 “어떻게 대 보죠? 나이라면 민증을 까면 되겠지만. 소득세를 얼마나 내나로 하면 되려나?”

 여자가 은근히 남자들의 경쟁심을 자극했다. 

 “순진하시네. 게임 룰만 모르는 줄 알았더니. 세금 다 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헌팅캡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그러면 내기를 하면 되겠네요.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맞히기. 남은 칩을 걸고. 어때요?”

 내기를 하자는 여자의 말에 남자들의 눈이 반짝 하고 빛났다. 

 검은 양복이 이쪽저쪽 주머니에서 칩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자기가 먼저 힌트를 주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가 유치원에 다닐 무렵부터 하얀 것을 검다고 말하는 법과 검은 것을 희다고 말하는 법을 가르쳤어요. 하얀 것이 검을 수도 있다는 것을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는 법 말입니다. 사물의 모습이나 현상을 거꾸로 설명하지 못하면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 일이 힘들기도 했고 싫기도 했어요. 가업을 물려받았고, 지금은 아버지보다 더 유명하죠. 나를 만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이 모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검은 것을 희다고 믿게 하고, 흰 것을 검다고 믿게 해 준 덕분이랍니다.”

 “정답. 최고의 수임료를 받는다는 말이죠? 변호사죠?”

 여자가 외쳤고, 검은 양복이 풀이 죽은 얼굴로 칩을 테이블 가운데로 밀어놓았다. 

 “저도 힌트를 드리죠.”

 헌팅캡이 말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검은 것이 곧 흰 것이고, 흰 것이 곧 검은 것이죠. 사람들은 이런 오묘한 말을 좋아해요. 가득 찬 것이 곧 비어 있는 것이고, 비어 있는 것이 곧 가득 찬 것이다. 멋지지 않아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이처럼 물상의 경계를 뛰어넘어야 하지요. 네 것은 내 것이고 내 것도 내 것이다. 이런 논리로 풀지요. 빈 것이 곧 찬 것이니 가진 것을 모두 내놓고 비워라. 찬 것이 곧 빈 것이니 채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렇게요. 덕분에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모자를 쓰고 계셔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 염화시중의 미소구나.”

 검은 양복이 모자를 들고 머리를 쓰다듬는 흉내를 내며 말했다. 이제 체크 남방 차례였다.

 나지막하게 웃으며 체크 남방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검은 것이든, 흰 것이든, 빈 것이든, 찬 것이든, 모두 어디서 나왔습니까? 애초에 없었다면 없는 것에 대해 어떻게 논할 수가 있습니까? 우주 만물이란 것 자체가 없었어요. 그분이 만들기 전까지는. 이런 말 아십니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남편이 하는 일을 아내가 모르게, 아내가 하는 일을 남편이 모르게. 부모는 자식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자식은 부모가 하는 일을 모릅니다. 천상에 재물을 쌓기 위해 서로서로 모르게 하며 나에게 가지고 온답니다. 문전성시가 아니라 인산인해를 이루며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창조주? 어쩐지 같은 업종일 것 같더라니. 이제 여사님 차례예요.”

 헌팅캡이 말했다. 여자가 턱을 약간 위로 쳐들고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스스로 전지전능해요.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그 누구의 말을 인용할 필요도 없어요. 내가 만들면 되니까. 검은 것이 곧 흰 것이고 흰 것이 곧 검은 것이라는 말을 궤변에 불과하다고 깔 수도 있어요.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그 존재를 티끌보다 하찮게 만들 수도 있지요.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문전성시든 인산인해든 그 모든 사람들을 깡그리 집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어요.” 

 남자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체크 남방이 큰 소리로 물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왜 말이 안 돼요? 내 마음인데. 부자를 거지로 만들든, 노예를 왕으로 만들든. 존경받던 자가 멸시받고, 비천한 자가 존경을 받게 할 수도 있어요. 사람들은 이런 것에 열광하거든요.”

 “무엇으로 그런 일을 한다는 겁니까?” 

심각한 얼굴로 검은 양복이 물었다. 

 “거짓말로요.”

 “사기꾼이잖아. 그런데 사기 치는 것을 직업이라고 할 수 있나?” 

 검은 양복이 비아냥거렸다.

 “사기꾼이라니요? 잘하면 존경도 받을 수 있는 괜찮은 직업인데요.”

 “헛소리하지 마세요. 거짓말을 하면서 존경을 받다니.”

 “나는 당신들처럼 교묘하게 사람들을 현혹하지 않아요. 거짓말이라고 당당하게 밝히죠. 사람들은 내 말이 몽땅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엔 어떤 멋진 거짓말을 할까? 하고 가슴 설레며 기다리죠.”

체크 남방이 포기했다는 듯 칩을 테이블 가운데로 밀며 말했다.

 “이제 무슨 일을 하는지 밝히세요.” 

 “나요? 소설가예요.”

 여자가 조신하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인 칩들을 쓸어서 가방에 담았다.

(거짓말 삽니다. 2019, 나무와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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