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에세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몇 달이 지났다. 이웃 나라로 피난 간 우크라이나 사람이 65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폴란드는 수백만 명의 피난민을 받아주었고 서방측의 인도주의 지원물자와 무기를 우크라이나로 반입하는 관문역할을 하고 있다.
1991년 나는 바르샤바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배급제였기 때문에 배급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살 수 없었다. 살구나 체리 같은 농산물은 농부들에게서 살 수 있었지만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비롯한 육류나 공산품은 도깨비 시장에 가야 배급표 없이 살 수 있었다. 한국 교민들은 남자 네 명이 교대로 운전하면서 서 베를린까지 식품을 사러 갔다. 여전히 동서 베를린이 나뉘어져 있을 때였고, 동 베를린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비자를 받아야 했다. 정육과 달걀, 소시지, 버터 같은 식품을 사기 위해 그렇게 먼 길을 오갔던 때가 있었다. 불과 30년 전 일이다.
소련이 몰락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다. 어느 날 갑자기 배급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나라의 국민들이 국경을 넘어서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로 밀려왔다. 바르샤바와 베를린보다 몇 배나 먼 거리를 며칠 동안 달려서. 정착을 목적으로 하는 난민은 아니었다. 달러를 구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게 목적이었다. 폴란드 보다 서쪽에 있는 서유럽 나라들은 국경을 걸어 잠갔다. 그런데 폴란드 정부는 그들을 내쫓지 않고 바르샤바 시내에 있는 경기장을 내어 주었다.
교민들 사이에 스타디움 꼭대기에 가면 신기한 것들을 살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어느 추운 겨울날 나는 몇몇 교민과 함께 말로만 듣던 스타디움으로 갔다. 바르샤바의 겨울은 늘 영하 10도 이하지만 그날은 유난스레 추웠다. 경기장 일층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천막 가게가 들어차 있었는데 옷이나 운동화 같은 것들을 팔고 있었다. 우리는 스타디움 꼭대기로 올라갔다. 칼바람이 몰아쳐서 일 층보다 훨씬 추웠다. 오랫동안 모았을 우표가 든 앨범, 누군가의 머리 위에 얹혀 있었을 계급장이 달린 군인 모자, 소시지 몇 개, 굳어버린 치즈, 짝이 맞지 않는 커피 잔 세트, 낡은 사모바르, 손가락크기의 유리 인형, 품질이 낮은 마트료시카, 동으로 만든 레닌의 흉상, 여우 목도리, 밍크 모자 같은 온갖 물건이 있었지만 누구도 사지 않을 것 같은 게 더 많았다. 집에 있는 모든 것을 가져온 건 아닌가 싶었다.
나는 유리 인형과 우표가 가득 들어 있는 앨범을 사고 싶었다. 되돌아가려는 찰나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앉아 있는 여자의 바구니에 눈이 갔다. 바구니 속에는 부러진 양초가 열 자루쯤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여자가 검지를 세우며 “원 달러” 하고 말했다. 마법사의 주문에 걸리기라도 한듯 나는 지갑에서 일 달러를 꺼내 주었다. 여자가 지폐에 입을 맞추며 성호를 그었다. 여자는 초를 담은 봉지를 기어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여자 옆에 외투도 입지 못한 남자가 추위에 떨고 있었다. 남자가 애절한 눈빛으로 ‘파니’하며 나를 불렀다. 파니는 아줌마와 아가씨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남자가 붉은색 목걸이를 내게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 든 목걸이에서는 비린내가 났다. 다섯 가닥을 꼬아서 만든 목걸이는 제법 묵직했고 짙은 핏빛이었다.
소비에트 연방국가 중에 산호가 나는 나라가 있었나? 의아해하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는 파키스탄에서 왔다고 했다. 아라비아 해가 있는 파키스탄?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산호를 채취했으며 아내와 어머니가 목걸이로 만들었다고 열심히 설명했다. 목걸이 한 개 값은 단돈 2달러였다. 나는 세 개를 모두 샀다. 보석 산호는 연산호로 만든다. 남자의 목걸이는 경산호 줄기가 분명했고 비린내가 나서 보석으로서는 아무 가치가 없었다.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꾸미기 위해 바닷가 사람들이 만든 목걸이가 분명했다. 유리인형이나 우표에 마음이 끌렸는데 예정에 없이 양초와 목걸이를 산 셈이었다. 남자는 여러 번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나는 어쩐지 민망했다. 허둥대는 나를 보며 함께 간 교민이 쓸모없는 것만 산다고 핀잔했다. 교민은 여우 목도리와 밍크 모자를 샀다.
며칠 후 신문에 기사가 떴다. 폴란드 국경을 넘어가던 버스 안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바르샤바로 오다가 죽은 사람을 버스에 숨겨둔 채 스타디움에서 장사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기자는 동행자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범죄자라고 몰아세우지도 않았고, 파렴치하다고 손가락질을 하지도 않았다. 다만 너무 안타깝다고 썼다. 매도하고 질시하는 기사를 쓰지 않은 기자가 존경스러웠다. 우리나라는 난민에게 매우 가혹하게 군다. 멸시와 조롱을 퍼붓는 사람도 많다. 20세기 초에 우리 선조들도 난민이 되어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았었다.
누리호가 무사히 궤도에 안착함으로서 대한민국은 7대 우주 강국이 되었다. 누리호가 날아오르는 장면에 감격하는 순간 불현듯 부러진 양초와 비린내 나던 산호 목걸이가 떠올랐다. 수만 리 길을 달려와 몇 달러를 벌어갔던 그들은 지금 행복할까? 스타디움에 왔던 사람들 중에는 러시아의 공격을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편을 들고 있는 벨라루스 사람이 모두 있었다. 그들은 함께 폴란드 국경을 넘는 동지였다. 지금은? 진영이 다르다는 이유로 반목하고 질시한다.
진영논리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보수와 진보, 부자와 빈자, 동쪽과 서쪽, 여당과 야당. 갈등에 관한 뉴스는 넘치지만 심금을 울리는 따뜻한 기사 한 줄은 보기 어렵다.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묻고 싶다. 가족과 이웃을 이해하고 사랑하면 안 되겠느냐고? 서로 사랑할 때 개개인의 행복도 더 커지지 않겠느냐고?
피난 갈 시간이 충분했는데도 고향에 남은 사람들은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 더 이상의 희생이 없기를 바라고,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 고향에서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2022. 마음이 머문 순간들, 이대동창문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