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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신 May 11. 2023

이화에 월백하고

[감성 에세이]

4월이면 하얀 배꽃을 보며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던 장면이 떠오른다. 학교 이름이 이화梨花라서 배나무를 심은 건지, 원래 배나무가 많아서 학교 이름을 이화라고 지은 건지는 알 수 없다. 채플이 있는 날이면 대강당 앞 계단에 앉아서 배꽃을 보며 친구들과 수다를 떨곤 했다. 예전에는 높은 계단 위에 우뚝 솟아있는 대강당이 제일 먼저 보였는데 지금은 이화캠퍼스 복합단지에 시선이 간다. 복합단지를 왼쪽에 두고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입학관이 있다. 입학관 앞에 있는 정원이 ‘배꽃뜰’이다. 봄이 되면 크고 작은 배나무들에 하얀 꽃이 피고 가을이면 탐스러운 배가 열린다. 배꽃을 보며 꿈을 이야기했던 친구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시조에 관한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은 날 나는 안양천변 벚꽃길을 걷고 있었다. 이화梨花를 노래한 시조라는 제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로 쓰겠다고 대답했다. 아름드리 벚나무가 만든 꽃 터널을 지나며 불현듯 떠오른 구절이 ‘이화에 월백하고’였기 때문이다. 이런 우연이 있나? 싶었다. 서울에서는 배꽃이 만개한 풍경을 보기 어려우니 벚꽃을 보면서 이화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안양천 벚나무는 키가 너무 커서 꽃잎에 월백하는 광경은 볼 수 없다. 그러나 배나무라면. 배나무라면 하얀 배꽃에 반사되어 조각조각 부서지는 달빛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벚꽃 아래를 걸으며 나는 배꽃에 부서지는 달빛을 상상했다.

이화에 월백하고의 나머지 구절은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이다.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하늘의 은하수를 바라본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봄의 마음을 자규가 알 리가 없다. 다만 정이 많은 나만 밤을 지새운다. 고려 말 이조년이 망해 가는 나라를 생각하며 지은 시조라고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해석할 필요가 있으랴. 정서적이고 다감한 사람의 봄노래라고 생각한들 어떠리.

조선 기생 이매창은 배꽃을 이렇게 노래했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배꽃 잎이 흩날릴 때 헤어진 연인이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며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두 시조의 시간 간극은 대략 200년이다. 그러나 다가오는 감동에는 차이가 없다. 시조는 이처럼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뛰어넘는다. 정해진 운율에 맞춰 쓰는, 50자가 못 되는 짧은 글이지만 어떤 장르보다 힘이 있다. 수십 년 전 배운 이조년의 다정가多情歌가 지금도 술술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이유다.

시조가 지나간 시절의 문학으로 인식되는 게 아쉽다. 시조를 짓는 사람조차 문학적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가끔 시조 한 수씩 카톡으로 보내주는 목사님이 계신다. 작품집을 내는 게 어떠냐고 물으면 손사래를 치신다. 카톡으로 보내주신 글 중에 배꽃을 노래한 시조가 있었던 것 같아서 지나간 대화를 찾아보았다. ‘바람결 지나가듯 세월도 빠르구나 배꽃은 피고지고 또다시 피고지고 아련한 옛사랑이여 마음속 아파오네’ 읽을 당시에는 목사님의 첫사랑 이야긴가 생각했으나 물어보지는 않았다. 

올해 봄꽃 개화 시기가 예년보다 열흘 가량 빨랐기 때문인지 이틀 동안 내린 봄비에 벚꽃이 모두 지고 말았다. 나는 서둘러 ‘배꽃뜰’로 갔다. 배꽃이 하얗게 피어 있었다.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밤이 되면 배꽃 위에 맑은 달빛이 부서지겠지. 배꽃에 정신을 팔고 있는데 목사님으로부터 또 한 편의 시조가 도착했다. 어쩌면 이렇게 마침맞을 수가 있을까. 

‘햇빛과 산빛깔이 그윽한 배나무골 스스로 몰입되어 그속에 들어가니 달속에 꽃향기속에 그리움 그려지네’

배꽃뜰에서 시조를 읽으며 목사님을 생각한다. 목사가 아니라 시조 시인이 되셔야 했던 것 아닐까. 낭만이 가득한, 다정다감한 목사님께서 오래오래 시조를 쓰시기를 바란다. 그래야 나도 선조들의 정취가 가득한 시조를 오래오래 즐길 수 있을 테니까. (문학의집 서울, 제2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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