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아득하게 높았다. 구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내가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봄날과 함께 세종문화 회관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광장은 준비 운동을 하거나 제자리 뛰기를 하는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로 뜨거웠다. 민 소장은 이미 러닝 복을 입고 있었다.
빨리 가서 칩 받고, 옷 갈아입고, 물품 보관 차량에 소지품 맡겨. 잘 할 수 있지?
파이팅을 외치며 그가 주먹을 내밀었다. 그의 주먹과 내 주먹이 맞닿았을 때,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봄날과 내가 속한 E 그룹 위치는 행렬의 맨 끝, 광화문 현판 앞이었다.
민 소장을 처음 만난 곳은 한강 변에 있는 심리치료실이었다. 창에는 암막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일정한 간격으로 벽면에 붙어 있는 깔때기 모양의 전등은 위쪽으로 빛을 쏘아 올렸다. 천장에 부딪혔다 떨어지는 불빛 덕분에 실내는 은밀하고 안온했다. 정면 오른쪽에 카우치가 있고, 열 개쯤 되는 이인용 책상이 두 줄로 놓여 있었다. 출입문 옆쪽 칸막이로 구분된 공간은 심리검사실이라고 했다.
온화한 인상일 거라는 내 기대와 달리 민 소장은 운동선수처럼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남자였다. 우락부락한 인상과 달리 그는 송곳처럼 예리한 눈빛으로 나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먼저 애칭부터 정하세요. 치료실에서는 오직 애칭으로만 서로를 식별합니다. 본명은 묻지도 말고 가르쳐 주지도 마세요.
나는 명찰에 ‘올랜더’라고 써서 가슴에 달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집에서 키우는 유도화의 영어 이름이 올랜더였다. 후배의 애칭은 봄날이었고, 덩치 큰 중년 여자는 젤로스, 삼십 대로 보이는 남자는 아이언맨, 턱이 뾰족하고 소심해 보이는 청년은 선비였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치료는 유도심상치료(Guided Imagery Therapy)라는 어려운 이름이었다. 민 소장이 처음 참여하는 나를 위해 집단의 규칙을 설명해 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떠오른 이미지를 묘사한다, 다른 사람이 한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으면 통과라고 말한다… 등등.
민 소장이 전등 스위치를 내렸다. 이제 조명은 앞쪽에 앉은 그의 머리 위로만 떨어졌다. 아래로 드리운 그림자 때문인지 그의 표정이 간달프처럼 오묘하고 신비했다.
오늘 집단 심상 주제는 소풍입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다음 편안한 마음으로 소풍 가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리버브를 넣은 것처럼 여운을 남기는 민 소장의 목소리가 치료실을 채웠다.
소풍가는 장면을 떠올리란 말이지? 내가 소풍, 소풍하며 마음속으로 소풍이라는 단어를 되뇌고 있을 때 봄날이 소풍의 서막을 열었다.
제주도로 가려고 전철을 타고 김포공항으로 가고 있습니다.
소풍을 제주도까지 간다고? 너무 멀잖아. 참, 이의를 제기하면 안 된다고 했지? 규칙을 생각하는 사이에 젤로스가 봄날의 말을 받았다.
봄날이 검은 원피스를 입고 소풍을 왔습니다.
헐, 소풍 가는 날 검은 옷을 입히다니. 이런저런 잡념이 계속 떠올랐다. 내 차례였다. 통과라고 말할 작정이었는데 ‘절벽 위에 있는 하얀 집으로 갑니다.’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동시에 눈앞에 푸른 바다를 안고 서 있는 아름다운 집이 나타났다.
바닷물이 차올라 집 안으로 들어옵니다. 올랜더가 물 위에 둥둥 떠 있습니다.
졸지에 나는 물에 빠진 사람이 되었다. 나를 물에 빠뜨린 사람은 아이언맨이었다.
걱정했는데 어느새 물이 모두 없어졌어요.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가 푸르고 아름답습니다.
선비가 상황을 수습했다. 선비의 말을 듣는 순간 물이 모두 사라졌다. 신기했다. 다음 순서는 봄날이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봄날은 통과라고 말하지도 않고 다음 상을 보태지도 않은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답답해서 눈을 뜨고 싶었다.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지 생각해 봐야죠?
민 소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두꺼운 가슴이 울림통 역할을 하는지 그의 목소리는 공명이 잘 되었고, 작게 말해도 또렷하게 의미 전달이 되었다. 봄날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규칙을 잘 알고 있을 봄날이 침묵을 지키는 건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문제에 봉착한 건 아닐까? 어떡하지?
사격장에 가서 총을 쏩니다.
제주도에 놀러 갔을 때 들렀던 실탄 사격장을 떠올리며 봄날을 건너뛰고 내가 말했다.
총을 쏘기 시작합니다. 올랜더가 모두 명중시켰어요.
젤로스가 나를 명사수로 만들었다. 물에 빠졌을 때보다 더 당황했다. 뭐야? 생각하는데 갑자기 눈앞에 과녁이 나타났다. 과녁 가운데 있는 검은 동그라미가 점점 커지더니 꼬리를 길게 끌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동그라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한 발, 두 발, 계속 쏘았다. 탕탕 울리는 파열음과 함께 검은 덩어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내 상에 몰입해 있는 동안에도 순서는 계속 돌아갔다.
먹을 것을 사서 숙소에서 먹는 게 어떨까요?
선비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차례였다. 상에 집중했다. 편의점에서 술과 안주를 사는 내 모습이 떠올랐고, ……우리는 숙소에서 술을 마셨고, 수다를 떨었다. 바이칼 호수에 가고 싶다는 내 말에 아이언맨이 통역은 자신이 해 주겠다고 말했다. 갑자기 젤로스가 우리를 김포공항으로 데리고 갔다. 소풍의 시작처럼 끝도 난데없었다. 선비가 집으로 가려고 지하철을 탄다고 말하자 민 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지개를 켭니다. 주먹을 꼭 쥐고 눈을 뜹니다.
민 소장이 각자의 대인 관계 양상을 분석해 주었다. 호텔로 가고 싶었는데 절벽 위의 집으로 갔다고 해서 집을 침수시킨 아이언맨은 분노를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하고, 숙소에서 바로 김포공항으로 가는 바람에 당황했지만 젤로스의 속도를 따라갔다는 선비는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훈련을 해야 하고…….
집단심상은 끝났지만 나는 한동안 흥분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총알이 튀어 나가며 손끝에서 어깨로 전해지던 반동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난생처음 해 보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민 소장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특별했다.
집단의 정식 멤버가 된 나는 매주 치료실에 갔다. 어느 날 봄날이 민 소장 앞에 커피와 쿠키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는 순간 민 소장의 두툼한 손이 봄날의 어깨에서 등을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그 순간 내 등이 스멀거렸다. 옷 속으로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몸을 흔들어 벌레를 털어냈다. 그 순간 “무슨 짓이야? 내가 성추행이라도 한 줄 알겠네.”라는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최 부장이었다. 모니터에 정신이 팔려있는 내 등을 그가 툭툭 쳤고, 나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 맹렬히 몸을 흔들었고, 모든 직원의 시선이 내 자리로 쏠렸다. 얼굴이 벌게진 부장이 화를 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있을 때 그랬다면 내 반응을 제어할 수 있었을 텐데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게 문제였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스럼없이 여직원들의 등을 두드리곤 했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앉아 있는 내게 봄날이 괜찮은지 물었다.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봄날이 커피를 가만히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커피 향이 후각을 자극했지만 마셔야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갑자기 의자가 휙 돌아갔다. 봄날이 무릎을 굽히고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의 정수리가 내려다보였다. 가마가 왼쪽으로 치우친 걸 보니 고집이 세겠구나, 생각하는데 그녀가 내 허벅지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언니, 할 말 있어요.”
뻔한 위로의 말이라면 듣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일로 여러 번 사직서를 냈고 점점 작은 회사로 옮기는 중이었다. 이 회사에서도 쫓겨나면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내 허벅지 위에 놓인 봄날의 왼손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언제나 여러 줄의 팔찌를 끼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팔찌를 팔꿈치 쪽으로 밀었다. 무의식적인 행위였다. 맹세코 그녀의 팔목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하얀 팔목에 피부가 도드라진 선이 몇 개 있었다. 얼마나 여러 번 자기를 버리려고 했는지 단박에 읽혔다. 황급히 내 손을 뿌리치고 일어선 봄날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나도 몹시 당황했다. 형편없는 성적표를 내밀고 전전긍긍하는 아이처럼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랐다.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런 거야, 정말 미안해.”
타박하거나 원망할 거라는 내 염려와 거리가 먼 말을 봄날이 꺼냈다.
“언니, 부탁이 있는데 꼭 들어줘야 해요.”
“무슨 부탁?”
“내가 나가는 심리치료실이 있는데 언니랑 같이 다니고 싶어요.”
내가 한 짓 때문에라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심리치료에 마음이 끌리기도 했다. 봄날은 나를 보며 자신을 떠올린 게 틀림없었다. 나 역시 치료를 시작한 후 봄날을 볼 때마다 나를 떠올리게 되었으니까.
봄날과 나는 남대문을 돌아나가는 중이다. 연도에 늘어서 있던 사람들이 마라톤 행렬의 끝자락인 우리에게도 파이팅을 외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달리면서도 나는 민 소장과 봄날에 대해 생각했다. 봄날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내가 키우는 유도화 꽃잎처럼 그녀의 뺨이 붉었다.
내가 유도화와 함께 산 지 십 년이 다 되어 간다. 베란다는 물론이고 좁은 실내를 몽땅 차지한 유도화 때문에 운신이 불편할 정도지만 나는 진분홍 꽃들을 보는 게 좋았다. 첫 직장에서 소동을 일으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던 날 원룸촌 입구에 트럭이 서 있었다. 아저씨가 본전에 줄 테니 하나만 사 가라며 진분홍 꽃이 피어 있는 화분을 내밀었다. 꽃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 채 물을 주며 길렀다. 그날 이후 나는 직장을 옮길 때마다 습관처럼 유도화를 샀다. 양재동 꽃시장에서 사기도 했고 인터넷으로 주문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판매가 중지되었다. 유도화 독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뉴스 때문이었다. 가지를 잘라서 빈 화분에 꽂아 두었더니 신기하게도 뿌리가 나며 살아났다. 내게 있어 꽃은 곧 유도화였다. 그런데 민 소장이 꽃을 떠올리라고 했을 때 눈앞이 깜깜하기만 했다. 머릿속으로 계속 유도화를 생각했으나 허사였다. 집중하려고 애썼다.
생각을 버리고 마음으로 그리는 겁니다.
내 미간에 잡힌 주름을 본 것일까? 민 소장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으로, 생각은 버리고 마음으로. 마침내 눈앞에 나타난 건 유도화가 아니었다. 줄기도 없고 이파리도 없는 빨간 장미였다. 줄기와 이파리를 간절히 바랐으나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민 소장은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줄기가 없는 장미가 나타났다고 해석했다. 기억을 잃었다고?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올랜더, 집중하지 않고 뭐 하는 거예요? 왜 종이에 구멍을 뚫고 있죠?
외침에 가까운 민 소장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내 앞에는 볼펜심으로 구멍을 잔뜩 뚫어놓은 A4 용지가 놓여 있었다.
아, …….
올랜더만 눈을 감고 구멍 뚫린 종이에 집중하며 상을 떠올립니다.
나는 민 소장의 지시에 따라 눈을 감았다.
얇은 껍질 위에 바짝 일어서 있는 생선 비늘이 보여요.
생선 비늘? 상에 대해 설명해 볼래요?
단발머리의 내가 어른 팔뚝만한 조기를 앞에 두고 쩔쩔매고 있어요. 빨리 비늘을 치라고 엄마가 나를 다그쳐요. 조기 꼬리를 꼭 잡고 머리 쪽으로 칼날을 밀었으나 칼날이 자꾸 비늘에 걸릴 뿐이라 진땀이 나요. 더 세게 밀지 못하느냐고 엄마가 소리를 버럭 질러요. 나는 간신히 비늘을 쳐서 찜통에 넣어요. 찜통 뚜껑을 열어요. 솟아오른 김이 시야를 가리고, 그리고…, 이걸 제사상에 어떻게 올리라고? 너나 먹어라. 라는 엄마의 호통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내게 휙 날아와요. 뒤로 물러나다 철퍼덕 주저앉은 내 치마 위에 떨어진 건 얇은 껍질 위에 촘촘하게 곧추서 있는 비늘이예요.
지금 느끼는 감정은?
슬퍼요. 그날 이후 오랫동안 무엇이든 촘촘하게 박혀 있는 것을 보면 소름이 끼쳤어요. 갯바위에 조밀하게 붙어 있는 홍합들을 볼 때조차도. 종이에 구멍을 뚫는 버릇이 그때 생긴 거 같아요. 컴퍼스의 뾰쪽한 부분으로 종이를 꼭꼭 누른 다음 뒤집어요. 계속 보고 있노라면 미간이 찡하게 아리며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종이를 갈기갈기 찢으면 두근거림이 멈추었어요.
요즘도 그런가요?
아뇨, 대학에 입학해서 기숙사 생활을 할 때 없어졌어요.
올랜더의 마음 문제가 상당히 깊어. 치료 기간이 길어질 거 같아.
민 소장은 내가 심상치료를 오래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민 소장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럴 예정이었다. 기억을 찾아 나가는 작업이 두려우면서도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날 주제는 집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캄캄한 암흑뿐이었다.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았다.
을지로 3가를 지날 무렵 숨이 턱에 차기 시작했다. 진행 요원이 생수병을 건넸다. 한 모금 마시고 잠시 걸었다. 봄날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작은 체구 어디에서 힘이 나는 걸까? 두려움에 떨며 민 소장의 품에 안겨서 울던 봄날과는 사뭇 달랐다.
민 소장이 봄날을 꼭 안고 달래주었던 날은 초원 심상을 한 날이었다. 풀과 꽃들을 짓밟으며 사납게 달려오는 말이 있는데 피할 곳이 없다면서 봄날이 울었다. 봄날을 품에 안은 민 소장은 눈을 반쯤 감고 “괜찮아,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하며 봄날을 달랬다. 그의 목소리가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했다. 나는 봄날이 부러웠다. 어떤 가슴이라도 좋으니 내게도 기댈 가슴이 있었으면 싶었다.
이상하게 내 초원에는 짧은 풀밖에 없었다. 꽃 한 송이, 풀벌레 한 마리 없어서 무엇이든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사람, 동물이나 식물, 아니면 집이나 바위 같은 거라도 떠올리려고 했으나 연두색 풀밭 위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풀빛이 아름다웠지만 느낌은 슬펐다.
올랜더! ‘나는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구나.’를 큰 소리로 세 번 반복해요.
민 소장이 지시했다. 말투는 강압적이고 표정은 차가웠다. 거부할 수 없는 무자비함조차 느껴졌다. 그의 말에 복종하려고 애썼으나 말들은 입속에서 뱅글뱅글 맴돌기만 했을 뿐 명확하게 공중으로 날아오르지 못했다. 완전히 텅 빈 마음의 소유자라니. 찌르르 거리는 풀벌레보다 가여운 존재 아닌가. 몸과 마음 모두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심리치료를 받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문제점을 파악함으로써 밝고 긍정적인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초원 심상 이후 나는 점점 더 복잡한 미로에 갇히는 기분이었다.
어머니 심상을 했던 날 검푸른 일렁임만 보여 불쾌했는데 봄날의 상이 내 안에 있던 무언가를 건드렸다. 봄날의 상이 내 상처럼 느껴졌다.
회색 거리에 빨랫줄이 있어요. 흰색 종이가 끝없이 매달려 있는데, 종이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나는 저절로 알아요. 호흡조차 멈추고 조심조심 걸어요. 종이 한 장이 살짝 흔들리자 도미노처럼 옆의 종이들이 펄럭여요. 머리에 수건을 쓴 여자가 나를 잡으러 와요. 도망을 쳐야 하는데 발이 땅에 붙어버렸는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해요. 그런데…, 가까이 다가온 사람은 엄마예요. 엄마가 나를 번쩍 들어서…, 번쩍 들어서…, 돌로 된 절구통에 넣어요. 커다란 절굿공이가 천천히 나를 향해 내려오고 있어요. 아, 가슴이 답답해요. 숨을 못 쉬겠어요.
끊어졌다 이어지는 봄날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엄마가 나라는 존재를 규정해왔는데도 단 한 번도 거부하지 못했다는 깨달음이 일었다. 내게도 엄마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엄마는 걸핏하면 내게 선머슴 같다며 핀잔했다. 내가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를 한 건 남동생이 잃은 걸 따 주기 위해서였다. 장남인 그 애가 울면 엄마는 나를 때렸다. 사정이 어떻든 선머슴이라는 단어가 귀에 붙어서 나는 내가 남성적이고 활발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민 소장은 정반대의 말을 했다. 내가 동적인 사람이 아니라 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의 늪 심상을 분석하며 민 소장이 다시 강조했다. 정적인 사람이라고 했던 자기 말을 믿어야 한다고.
크고 우람한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숲이 나타났다. 얼핏 어른거린 붉은색이 유도화 같아서 다가가니 커다란 늪이 있었다. 정지된 화면처럼 늪은 미동조차 없었다. 나는 괴물이 솟구쳐 오르거나, 아니면 근처 숲에서 뛰어나온 사슴이나 토끼라도 늪에 빠지기를 바랐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공중에 피터 팬이 나타났다. 붉은 아른거림을 향해 날아가던 피터 팬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올랜더가 늪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했던 건 정적인 특징 때문이야. 동적인 사람이라면 움직이는 늪이나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늪을 체험했겠지. 피터 팬이 올랜더를 보는 게 아니라 올랜더가 피터 팬을 보는 거야. 피터 팬은 동적인 부분, 즉 실행이나 활동을 상징하지만, 퇴행을 암시하기도 해. 피터 팬처럼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은 있지만 정작 올랜더는 전혀 활동적이지 않아. 그런데 왜 유도화가 피었다고 느꼈을까? 숙제가 하나 더 생겼네.
민 소장은 우리 모두에게 자신의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생각하라고 주문했다.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는 말이 섬광처럼 내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마음을 그리던 날. 어슴푸레한 황혼녘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람들의 물결을 거스르며 걸어가는 내가 보였다. 하나, 둘, 사람들이 내 곁을 스치며 지나갔다. 나만 홀로 저 멀리 보이는 황갈색 사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모래 먼지가 날아올랐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고, 나는 어느새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흘깃 뒤돌아보는 내 얼굴이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몸은 보이지 않고 오직 얼굴만 보였다.
민 소장이 내게 말했다.
올랜더는 이것을 자기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다시 한번 마음을 느껴보세요. 방금 보았던 상에 대한 느낌을 기억하며 마음을 떠올립니다.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달리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들어 올리기도 힘든 다리와 달리 봄날을 향한 마음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힘들지 않아?
봄날에게 물었다.
아직 견딜 만해요.
그만 달릴까? 죽을 거 같아.
이렇게 빨리 그만두면 나중에 선생님께 뭐라고 하죠?
봄날이 변명할 구실부터 찾았다. 그녀는 민 소장을 신처럼 숭배한다. 반년 가까이 최면 치료도 받고 있다.
도저히 못 뛰겠어. 결승점에서 선생님을 기다리자.
민 소장은 멈추지 않고 달릴 것이다. 그는 이번이 세 번째 참가라고 했다. 나는 인도 쪽으로 빠져나와서 보도블록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애초부터 오래 달릴 생각은 없었다. 민 소장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 봄날 때문에 참가했을 뿐이다. 어쩐지 봄날 혼자 뛰게 두면 안 될 거 같았다. 아이언맨과 젤로스와 선비가 결승점에서 민 소장과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나 때문에 포기한 봄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천천히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전동차가 표백된 불빛에 사람들을 가두고 나아갔다. 차창 밖의 암흑 때문인지 하얀 불빛 때문인지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떠나야 하기에 떠나가는 피난민들처럼 지쳐 보였다. 그러나 저들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는 게 나처럼 힘들지는 않을 테지.
민 소장은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 문제의 본질을 모른다고 했다. ‘아이 때문에 힘들어요.’라고 말하지만, 아이가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잘못된 자기 이해는 왜곡된 자기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모습을 올바르게 보아야 자아 성장이 가능해. 나야말로 운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사람이지.
자아 심상을 했던 날. 운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나의 모습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나 자신을 떠올렸다. 그런데 사람도 아니고 내 모습도 아니었다. 현충사에서 본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었다. 그림이라서 당황했고, 남자라서 놀랐다. 내가 아닌 건 그렇다 하더라도 왜 남자인가? 마더 테레사, 마거릿 대처, 신사임당 같은 여류인사를 생각하며 상을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올랜더는 여자로서의 정체성에 문제가 있어.
여자로서의 정체성에 문제가 있다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내 항의에 민 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해. 내 해석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고 그 중요성을 깨닫도록 해. 최면 치료도 받고.
민 소장의 언성이 높아졌다. 바지를 즐겨 입고 화장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서 바지 정장이나 사파리룩이 잘 어울리기 때문에 선호하는 것일 뿐.
선생님, 저도 최면 치료를 받고 싶어요.
아이언맨이 불쑥 끼어들었다.
최면치료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지금 하는 치료나 충실히 받아. 너는 도무지 진전이 없잖아.
민 소장이 아이언맨을 나무랐다.
여자의 정체성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럼 나는 남자의 정체성을 가졌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건 아니었다. 남자와 함께 있는 게 불편하고 옷깃도 스치기 싫은데 정체성이 왜 남자로 나왔을까? 이런 허무맹랑한 말을 들으려고 비싼 돈 내며 여기 앉아 있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왜 잃어버렸나? 장미 줄기는 어디로 갔나? ‘왜?’라는 의문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고, 생각할수록 스트레스를 받았다. 온몸의 힘이 빠지며 맥이 풀렸다. 분노와 허탈감이 나를 감쌌다. 마음이 헛헛해서 그런지 발걸음마저 휘청거렸다. 보도블록이 조금만 솟아있어도 발이 걸려 넘어졌다.
집에 와서 멍하니 유도화를 바라보았다. 꽃잎을 하나하나 뜯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몇 잎 뜯어보았으나 헛헛함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몇 잎 더 뜯었다. 습관처럼 몸에 밴 좌절감 한 잎, 손상된 자긍심 한 잎, 내가 모르는 내 모습에 한 잎,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에 한 잎…. 그만 뜯어야 한다고 여기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발치에 쌓인 유도화 꽃잎이 무더기를 이루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어느 날, 민 소장은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치료를 시작했다.
눈을 감고 지금 여기서 느끼는 감정에 집중하세요. 느낌을 한 단어로 말하는 겁니다.
봄날이 사랑으로 시작했고, 젤로스가 회한으로 받았다. 선비의 비겁, 아이언맨의 불화에 이어 내가 내뱉은 단어는 기만이었다. 상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떠올랐듯이 기만이라는 단어 역시 제 맘대로 입 밖으로 나갔다. 지금, 여기, 그리고 기만. 동시에 세 단어를 생각하며 심상을 시작했다.
인도 위 가로수 사이에 민 소장이 서 있었다. 카키색 바바리코트를 입은 그가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왔다. 이삼 미터 앞으로 다가온 그의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없었다. 그리다 만 그림이나 모자이크 처리를 한 것처럼 눈과 코와 입이 있어야 할 자리가 부옇기만 했다. 이게 뭐야 생각하며 눈, 코, 입을 만들어 주려고 했지만 뭉그러진 얼굴이 머리카락을 이고 있을 뿐이었다. 무서워서 상을 멀리 밀어내려고 했다. 내 의지와 달리 뭉그러진 얼굴의 남자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부딪칠 듯 바짝 다가왔을 때 이목구비가 생겨났다. 민 소장이 아니라 엄마를 닮은 남자였다.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불붙은 양초로 변했다. 일렁이는 불꽃 속에 사람의 눈 하나가 나타났다. 크고 둥근 눈 아래쪽에 피가 고이더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양초의 몸을 타고 흘러내린 빨간 핏물이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나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민 소장 얼굴에 눈코입이 없더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연분홍색 와이셔츠에 파란색 줄무늬 넥타이를 맨, 풋풋한 민 소장의 모습이 봄날의 상이었다. 그녀는 연인을 만나는 심정으로 치료실에 온다고 내게 속삭였다. 연인. 아름다운 그 낱말 위에 부옇게 뭉그러진 민 소장의 얼굴과 꽃잎이 떨어져 나간 봄날의 분홍장미와 봄날의 등을 쓰다듬던 민 소장의 커다란 손이 겹쳤다. 심상을 처음 했을 때 느꼈던 설렘과 달리 불길했다. 두렵고 불온하다고 느끼면서도 나는 치료실에 계속 나갔다. 저울의 한쪽에는 내 상에 대한 불안이, 반대쪽에는 기억의 편린을 찾아서 퍼즐을 맞추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 하반신을 얼음에 가두고 상반신에 불을 지르는 형국이었다.
이목구비 없는 얼굴이 민 소장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 같았지만, 막연한 느낌에 불과했다. 그를 왜 의심해야 하는지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불신은 치료실에서 시작된 게 아닐 수도 있었다. 길지 않은 생이지만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 속에 파묻혀 살았다. 사람도 세상도 관계도 내게는 모두 의아함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비로소 상담 과정을 적었다. 민 소장은 기록도 치료의 일환이니 심상과 해석을 적어나가라고 했지만 나는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스멀스멀 올라온 불신이 기록에 관한 동기를 부여했다. 지나간 기억을 되살리며 최대한 자세하게 적었다. ‘신체 접촉에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나’에서 시작했다. 민 소장을 처음 만났던 순간과 나와 봄날의 심상을 기억나는 대로 적고 민 소장의 해석도 적었다. 울었다거나 화를 냈다거나 하는 상황도 적었다. 빠뜨린 것은 없는지 다시 읽어 보았다. 적어 놓고 보니 석연찮은 점이 많았다. 말발굽에 짓밟혀 꽃들이 짓이겨진 봄날의 초원이 해석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밤낮으로 뇌리를 떠나지 않던 ‘왜’가 덩치를 부풀렸다. 봄날이 반년 넘게 받는다는 최면 치료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민 소장이 내게 최면 치료를 권했을 때 응하지 않았던 이유는 최면에 걸리면 의식을 도둑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최면 치료가 어떤 건지 꼭 알고 싶었다. 토요일 아침에 치료실로 갔다. 문은 잠겨 있었다. 돌아가야 하나 망설이는데 땡 하고 엘리베이터 멈추는 소리가 났다. 이어 공명음이 깊은 민 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바보…, 장애인들…, 그 돈은 안 갚아도 돼. ‘바보와 장애인’이라니, 누구를 지칭한 걸까? ‘들’이라는 접미사를 붙인 것으로 보아 한 명은 아닌 듯했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민 소장이 다가왔다.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 그는 인사말도 건네지 않고 출입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나는 눈으로 본 숫자를 몇 번이나 되뇌며 번호를 외웠다. 치료 일정을 조율하며 봄날의 치료일을 알아냈다. 금요일이었다. 사실 내 최면 치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금요일에 휴가를 내고 치료실에 잠입하기로 했다. 도어락의 숫자를 누를 때 나는 삐 소리가 우레보다 크게 느껴졌다. 입구에 있는 심리검사실에 숨었다. 출입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귀에 익숙한 민 소장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암막을 걷는 소리가 났다. 창의 블라인드도 열린 모양이었다. 주위가 환해졌다. 뒤이어 들리는 경쾌한 구둣발 소리. 나는 살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봄날이었다. 간식 바구니를 책상 위에 놓은 봄날이 카우치에 누웠다. 민 소장이 카우치 아래쪽에 섰다.
블라인드 사이로 쏟아져 들어온 햇빛이 봄날과 민 소장 사이에 다양한 음영을 만들어냈다. 홍조에 젖은 봄날의 뺨은 싱그러웠고 구불구불한 긴 머리카락은 다소 깊게 파인 원피스 앞섶 사이를 나른하게 오갔다. 민 소장이 봄날에게 최면을 걸었다. 봄날의 눈꺼풀이 스르르 닫혔다. 카우치 옆으로 흘러내린 봄날의 치맛자락이 유도화 꽃잎처럼 붉게 물결쳤다. 민 소장의 몸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려는 듯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카우치를 향해 조금 더 나아갔다. 다나에를 덮쳤던 황금 빗방울만큼 찬란한 금빛이 여린 꽃잎 사이를 떠돌았다. 내가 기르는 진분홍 유도화는 늘 불안해 보였지만 봄날의 얼굴은 황홀해 보였다. 민 소장이 고개를 숙이더니 봄날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인지를 속삭였다. 봄날이 턱을 높이 쳐들었다. 장미 꽃잎 같은 입술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석양의 눈부신 황금빛이 내 눈을 찔렀다. 눈을 감는 순간 갑자기 상이 떠올랐다. 민 소장은 혼자 심상을 하면 위험하다면서 못 하게 했다. ‘유도심상치료’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치료자의 지시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얼핏 그의 말이 떠올랐으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토끼가 눈 덮인 산속을 달리고 있었다. 이쪽저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토끼가 전속력으로 언덕을 오르고 있다. 토끼가 넘어진다. 몇 바퀴를 구른다. 하얀 눈가루가 바람에 날린다. 눈에 파묻힌 토끼를 향해 검은 그림자가 달려든다.
눈을 떴다. 본능적으로 몸을 숙이고 문을 향해 기어갔다. 치료실 밖으로 나온 나는 비상계단을 뛰어내려 건물 밖으로 내달렸다. 제구력을 상실한 투수가 던진 공처럼 몸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봄날이 흐느끼며 내뱉었던 말이 귓전을 울렸다.
사촌오빠에게 몹쓸 짓을 당했어. 엄마한테 말했는데 엄마는 내 뺨을 때렸어. 누구에게든 말하면 집에서 쫓아내 버릴 거라고 하면서…….
그날 나는 봄날을 안고 같이 울었다. 그리고 반드시 봄날을 지켜주겠다고 결심했었다.
석양의 황금빛은 더는 아름답지 않았다. 노을 속을 휘적휘적 걸었다. 지하철역을 지나고 굴다리를 지났다. 검푸른 물이 일렁이는 강이 눈앞에 나타났다. 바람이 불었다. 어둠이 노을을 조금씩 걷어갔다. 사라졌던 기억의 토막들이 되살아났다. 몸속에서 불덩이가 춤을 추었다. 강을 향해 나아갔다. 물속으로 난 계단을 하나씩 내려갔다. 다리가 잠기고 가슴이 잠겼다. 옷 속으로 물이 스며들었다. 얼굴마저 물속에 집어넣었다. 두 뺨을 스치는 물이 미지근했다. 어느 순간 물이 차갑게 느껴졌다. 물을 먹어 무거워진 자켓이 강심 쪽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자켓을 벗어서 흘려보내고 간신히 둔치에 올라섰을 때 성마른 바람이 젖은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욕실에 들어가서 더운물을 틀었다. 수증기가 거울 속의 내 얼굴을 조금씩 지워나갔다. 사라진 얼굴처럼 기억도 다시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때로는 불확실한 게 확실한 거보다 낫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워버리는 억압은 생존을 위한 무의식의 노력이라고 한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기억을 되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고 나자 정신이 들었다. 지워졌던 기억과 고통과 혼란 되살아났다. 나는 공책을 꺼냈다.
내 뺨을 때린 사람은?
제일 먼저 적은 문장이었다. 엄마가 내 뺨을 후려치던 장면이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아버지에게 말하면 집에서 쫓아내 버리겠다고 하면서 눈에서 불이 번쩍 날 만큼 한 번 더 때렸다. 봄날의 경험이 내 경험이었고 봄날의 상처가 내 상처였다. 지하철이나 만원 버스를 타지 못한 이유였고, 번번이 직장을 옮겨야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엄마는 왜? 자신의 남동생을 지키려고? 아니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도무지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민 소장에 관해서도 적었다.
표정: 인자한 표정으로 치료를 시작하지만, 순간순간 냉혹하고 권위적으로 변한다.
태도: 복종을 강요하며 이견을 허락하지 않는다.
눈빛: 내 옷 속을 파고들던 첫날의 눈빛, 봄날의 등을 쓰다듬던 욕망이 담긴 눈빛, 정체성 문제를 부인하는 나를 보던 냉소적인 눈빛, 온화한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권위적인 눈빛….
내 심상: 눈코입이 없었던 민 소장의 얼굴. 기만이라는 단어.
무의식이 주는 경고를 따라라. 그런데 봄날은 어쩌지?
종합운동장에 도착한 봄날과 나는 기록측정용 칩을 반납하고 물품 보관소에서 옷과 가방을 찾아서 결승선 앞 관중석으로 갔다. 젤로스와 아이언맨과 선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언맨이 준비한 꽃다발은 봄날만큼이나 컸다.
첫 주자가 운동장으로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대형 전광판에 뜬 우승자는 케냐 선수였다. 그는 두 손을 흔들며 힘들이지 않고 트랙을 한 바퀴 더 돌았다. 그때 전광판 아래 자막이 떴다.
- 50대 마라톤 참가자 의식 잃고 쓰러져 -
헉, 설마 우리 선생님은 아니겠죠?
기겁한 봄날이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선생님께 문제가 생기면 우리가 치료를 못 받게 되잖아요.
선비가 말했다.
야, 너는 오직 너밖에 모르는구나. 선생님 걱정은 안 해? 진짜 이기적이다.
아이언맨이 선비를 핀잔했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지레 걱정할 필요 없잖아. 하여간 쯧쯧.
젤로스의 말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민 소장을 기다리는 사이에 나는 몇 번이나 화장실에 다녀왔다. 소변이 마렵기도 했지만 내가 가지고 온 물병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적당히 차가운지, 뚜껑이 열리지는 않았는지, 무엇보다 틀림없이 내 가방에 잘 들어 있는지를.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때 젤로스가 봄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민 소장은 나이가 두 배나 많을 뿐만 아니라 상담자가 내담자와 사적인 관계를 맺으면 법적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고 했다. 봄날이 민 소장과 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자랑한 모양이었다.
선생님이 규칙이나 법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어요. 사랑이 중요하대요. 선생님은 언제나 옳아요.
옳다고? 옳다는 말의 정의가 뭔지 알기나 해?
아이언맨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온갖 재료가 아무렇게나 뒤섞인 밀가루 반죽처럼 생각이 뒤엉켰다. 토끼를 움켜쥐던 검은 그림자와 바들바들 떨던 토끼가 떠오르며 욕지기가 났다. 손끝이 아렸다. 너무 심하게 물어뜯어서 피가 배어 나올 지경인 손가락도 있었다. 최면 치료 때 내가 본 것을 봄날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내가 본 토끼와 검은 그림자에 대해 죄다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봄날이 저렇게 행복해하지 않는가? 저 얼굴이 진실 아닌가? 내가 무엇을 밝히려고 했고 무엇을 지키려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놀이공원에 있는 요술 거울 속의 상처럼 봄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앗, 선생님이다.
봄날이 손을 흔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전광판에 민 소장의 모습이 비쳤다. 나는 아이스백 속에 있는 물병의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꿀을 타서 그런지 은은하게 금빛이 돌았다. 유도화에 있는 올레안드린 성분은 강심 작용을 하지만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달린 후 농축액을 마시면 심장마비가 올 수 있다.
선생님, 완주를 축하합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이언맨이 꽃다발을 건넸고, 봄날이 민 소장의 품에 안겼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고통의 순간을 넘어서야 무아지경의 쾌감을 느낄 수 있지. 이 맛으로 뛰는 거야.
민 소장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리 내어 웃었다. 헉헉거리는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물병 바깥 부분에 살짝 맺힌 차가운 물방울을 닦았다. 그에게 병을 내미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길을 잃기라도 했는지 한 여자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붉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꽃밭을 헤매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붉은 들판을 갈팡질팡 나아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창작21 2023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