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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신 Nov 23. 2023

자작나무잎 하나

[엽편소설]

나는 다만 달리고 싶다.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다는 단순한 소망만이 내 가슴을 채우고 있다. 휙휙 빠르게 물러나는 키 큰 나무들. 밤새 내린 눈이 세상을 실버 화이트 캔버스로 바꿔 놓았다. 오직 선 하나로 남은 도로. 고적한 이 길을 끝까지 달리면 어떻게 될까? 저 멀리 보이는 소실점을 향해 자동차가 빠르게 나아간다. 언뜻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갈림길들.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오른쪽으로 급히 꺾는다. 순간의 변심變心이다. 나무를 들이받을 듯 자동차가 이리저리 비틀거린다. 

좁다란 길켠에 잎새를 떨군 자작나무들이 알몸을 드러내고 서 있다. 카 오디오의 볼륨을 높인다. 불안하게 울리는 슬픈 멜로디가 스산한 풍경에 녹아든다. 비창 교향곡 2악장. 차창 밖의 풍경과 내 마음과 음률이 완벽에 가깝게 일치한다. 창문을 내린다. 눈 속에 갇힌 자작나무들의 숨결은 음울하고 차갑다. 불안한 음률처럼 차가 이쪽저쪽으로 마구 미끄러진다. 기어를 2단으로 내린다. 바람에 날아오른 눈들이 시야를 가린다. 희뿌연 미망이 오히려 반갑다.

어느 순간 눈앞이 확 밝아지며 차가 빠르게 앞으로 내닫는다. 찰나를 지배한 건 본능이었다. 브레이크를 밟지 마. 핸들을 꽉 잡아. 어느새 차는 끝없이 펼쳐진 설원에 올라가 있었다. 길도 없고 다른 차들이 지나간 흔적도 없는 아득한 평원. 여기가 어디지? 푸른 물이 출렁이던 호수? 나와 자동차는 얼어붙은 호수 위에 있는 것이다. 사라지고 싶었던 마음과 달리 계속 나아가면 안 된다고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저 멀리 등대인양 홀로 서 있는 집이 보인다. 단 하나의 표적인 붉은 벽돌집. 표적을 향해 나는 자동차와 함께 느리게 전진했다. 

바람이 먹구름을 북쪽으로 몰아내는 중이다. 조각보의 한 조각처럼 푸른색이 살짝살짝 드러난다. 틈새로 쏟아진 햇빛에 캔버스의 실버 화이트는 눈부신 티타늄 화이트가 된다. 미간을 찌푸리며 시동을 끈다. 고요하다. 너무나 고요하다. 적요 속에서 나는 가만히 차창 밖을 응시한다. 송송송. 순백의 호수 위에 뚫려 있는 작은 구멍들. 뭐지? 구멍에 이끌려 차에서 내린다. 한발 한발 구멍을 향해 다가가서 쪼그리고 앉는다. 구멍들 속에 있는 건 나뭇잎이다. 구멍 하나에 나뭇잎 하나. 가래나무잎, 떡갈나무잎, 아기 손 같은 단풍나무잎, 그리고 자작나무잎. 호수 위로 날아왔던 나뭇잎들이 제각기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있다. 긴 시간 얼음 아래서 곱게 잠들어 있었을 나뭇잎들. 햇살이 제일 먼저 알아본 건 봄을 향한 소망을 가진 나뭇잎이었다. 나뭇잎을 감싸고 있는 살얼음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이파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자작나무잎이다. 축축한 잎새를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 본다. 자작나무를 스치던 차가운 냄새와는 다른 냄새가 났다. 항아리에서 꺼낸 홍시를 미소와 함께 건네던 할머니에게서 나던 냄새. 달콤함에 대한 기대로 가슴 설렜던 홍시 냄새와 따뜻하고 다정한 할머니의 냄새 같은….

손바닥 위에 나뭇잎을 올린 채 조심조심 걸어서 붉은 벽돌집으로 갔다. 설국의 카페에는 손님이 한 사람도 없었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뜨거운 맥주를 시켰다. 맥주잔에 자작나무 잎을 넣고 호오호오 불어가며 천천히 뜨거운 맥주를 마셨다. 식도를 지나 위에 다다른 열기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진다. 취기가 오른다. 나른한 눈빛으로 창밖을 본다. 호수가 기우뚱하고 옆으로 기운다. 고개를 반대쪽으로 꺾는다. 호수는 다시 반대쪽으로 기울고. 나는 남은 맥주를 다 마신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그래, 여기서 멈춰야겠지. 따뜻한 냄새를 찾았으니까. 오직 하나의 미련이나 단 한 점의 그리움만 있더라도 머물러야겠지. (문학나무 202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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