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마추어리즘에 반대한다
중학생 때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 때, 첫 느낌은 제목의 세련미였다.
당시 인기 한국 소설은 제목이 촌스럽다는 일관성이 있었지. ㅎㅎ
요즘 웹을 떠도는 글을 보면, 물론 잘 쓴 글도 있고 눈이 번쩍 뜨이는 좋은 콘텐츠를 소개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만, 대부분의 경우는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하여 대강 자신의 느낌을 두서없이 주절거려놓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경우가 많다. 움베르트 에코의 표현을 빌리면 '세탁물 리스트' 같은 글들. 오직 쓴 사람에게만 잠시나마 미약한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마저도 시간 지나면 쓰레기가 되는 종류의 노트들 말이다.
몇 년 전인가 동네에서 밥 먹으려고 식당에 들어갔는데, 이쁘게 차려입은 이십대로 추정되는 숙녀분들이 밥이 나오니까 인스타 꺼내서 사진을 찰칵찰칵 찍어서 바로 업로드를 했는데, 나는 그 흔하디 흔한 모습을 보면서, 아 언제부터 사람들이 저렇게 사진을 잘 찍게 되었을까, 하고 감탄했다. 사람들이 쉽게 카메라 필터를 사용하게 되면서 그리고 일상을 기록하는 게 '습관화'되면서 그 방식이 전반적으로 세련된 것은 맞지만, 이제는 그게 평준화되면서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인스타에 가보면, 이젠 누가 작가이고 누가 아마추어인지 분간이 잘 안될 정도다. 예전에는 멋진 일상을 구경하기 위해서는 책이나 사진 집 정도를 사보는 수고가 있어야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인스타 조금만 뒤적거려도 헉 소리가 나올 만큼 멋진 사진 솜씨를 뽐내는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이쯤에서 우메다 모치오 상이 2006년에 쓴 (후아 벌써 12년 전) 웹 진화론에 거론된 이야기를 복기해보자면,
웹/모바일은 우리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훌륭한 무기다. 일시에 모두가 고속도로로 달릴 수 있게 된 것. 그러나 톨게이트 부근에 도달하면 별 수 없는 '정체' 가 일어난다. 바둑에서도 마찬가지다. 좋은 수는 누구나 찾아볼 수 있게 공개되지만, 진짜 실력자를 가리기 위해서는 차원이 다른 경쟁이 필요한 것이다.
누구나 글 쓸 수 있고,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인스타에서 스타가 될 수 있지만,
진짜 스타는 그렇게 쉽게 탄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야 옳지 않을까...
재능과 실력은 결국 상대적 개념, 우위를 가릴 만한 장이 열려야 하는 것 아닐까?
사람들은 본격적인 업으로 삼지 않고 그저 흥미를 위해서 행하는 일들을 '취미'라고 이름 붙인다.
취미가 뭐예요?라고 물어보면 예전에는
독서/여행/식도락/ 영화.... 같은 뻔한 답들이 대부분이었다.
요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한 취미를 가질 수 있는 시대다. 그만큼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여가 시간을 확실히 잘 즐기고 있다는 느낌은 아주 긍정적이다. 그 원인에는 경제적인 풍요로 인한 물질적, 시간적 여유도 한몫을 하겠고 두 번째는 마케팅의 승리도 있겠다. 넘쳐나는 SNS의 홍수에서 넘들의 '보편화된 잘 먹고 잘 사고 (쇼핑) 잘 즐기는' 모습에 엄청난 자극(stimuli)을 받는 것. 사실 우리가 구독하고 있는 SNS 내용 중에, 돈을 받고 쓰는 상업적 포스팅이거나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상업활동을 유발하는 콘텐츠가 압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을 보면 사람들의 일상을 '노동'과 '그 밖의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밖의 것'에 순수한 기쁨을 위한 창조적인 활동이 여가가 될 수 있다고. 그런데 어느 순간 노동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와 피곤을 돈과 연관된 '소비'로 해소하기 시작하면 인간 삶이 '노동'과 '노동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로서의 소비'만 남게 되고, 결국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무화' 되어가기 시작한다는 경고가 나온다.
아마추어리즘과 이게 무슨 상관이냐고?
우리가 아마추어리즘 뒤에 숨는 간편함은, 바로 창조적인 여가 활동의 '비창조적인 방법' 때문이다.
누구나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그걸 올릴 수 있는 툴이 산재해있지만, 우리는 정작 남이 만든 제대로 된 창작물을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경험하고 존경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게 된다.
영화? 한 달에 만 얼마 내면 넷플릭스에 산더미처럼 나와. 토렌트 하면 못 구할 게 없어
음악? 유튜브에 없는 음악 있어? 광고가 싫으면 한 달에 만 얼마 내면 거의 모든 음악 들을 수 있어
사진? 내가 찍은 것도 멋있어, 사진작가의 이름 같은 것은 몰라
맛집? 검색하면 바로 나와
패션? 인스타 팔로우하는데서 봤는데 이 정도 입으면 되는 거야
이렇게 즐겨도, 물론 즐길 수 있고 그게 어떻다 말할 자격이 내게는 없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콘텐츠의 소비를 하락시키면 결국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두 가지다.
첫 째. 광고 붙은 콘텐츠
둘째. 허접한 콘텐츠.
요새는 저 두 개가 결합돼서 강력한 '허접한데 심지어 광고인 콘텐츠'가 SNS상에서 그야말로 판을 치고 있다. 그걸 보는데 시간을 30분 이상 쓰고 있는 사람들 보면 마케터로서 정말 죄송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어, 어쩌면 제대로 된 마케터 상실의 시대..... 일까? ) 그리고 이런 활동이 지속되면 좋은 콘텐츠가 멸종되기 딱 좋은 환경에 살게 된다.
극단적인 예로, 우리가 90년대에 음악이 하나 뜨면 너도 나도 돈을 주고 음반을 샀다. 그 시절 음악들을 지금도 즐겁게 듣고 있는 건 단순히 우리가 추억팔이를 해서만은 아니다. 그때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허접한 제작환경 속에서도 실력 있는 사람들이 인기를 누리는 시대였다. 지금처럼 우리가 인기가요 방송을 봐도 대형 그룹 몇 개 빼고는 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거나, 그마저도 다 너무 비슷해서 누가 누군지 헷갈릴 정도로 다양성 없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때는 김흥국과 서태지가 같은 방송에 나왔고 나란히 top이었다.
사람들에게 다시 물어본다. 너 자신이 그 분야의 전문가 맞냐고, 덕후 맞냐고
자신 있게 두 가슴에 손을 얹고 '네'라고 말할 사람 몇이나 될까?
그저 음악 링크 몇 개 들었다고 음악 덕후 되는 거 아니고,
페북 몇 년 해봤다고 글 좀 쓰는 사람 되는 거 아니고 ,
마케팅 몇 년 해봤다고 마케팅 잘하는 것도 아니다. (아니더라)
그렇다고 우리 모두 생업을 때려치우고 예술가가 되어야 하나? 전문가가 되어야 하나?
전문가는 너무 무겁고 불편하고 귀찮은 작업이잖아. 게다가 전문적인 일은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노동에 가까운 것이지 나의 지친 영혼에 휴식을 주는 취미로 하기에는 버겁고 무리가 되잖아.
아마추어라는 건 자유롭고 민주적인 데다가 숨을 구석이 너무 많단 말이야.
하지만 이제는 아마추어라는 이름 뒤에 숨지 말고,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서 '좀 주워들은 정도 ' 가 아니라, 덕을 갖춘 사람- 덕후라고 당당히 자신을 소개해보면 어떨까?
내 생각에 덕후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째, 다 좋아할 만하니까 좋아하는 거다
둘째, 아무리 어려운 대상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셋째, 어렵게 얻었지만, 기꺼이 다른 사람과 나누기 좋아한다.
덕후가 존재하는 장르나 제품이라는 뜻은 그만큼 '가치'가 높게 매겨진다는 뜻이다. 일종의 '덕후 인증 마크'라는 건데 세상은 너무나 공평해서 허접하게 만들어진 제품이나 매력 없는 사람에게 덕후가 붙질 않는다. 그래서 덕후가 좋다고 하는 건, 그냥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고 덮어두고 신뢰해도 어느 정도는 무방하다고 본다.
또 덕후는 세밀한 것 까지 찾아낸다. 찾아내기 어려울수록 더 열심히 찾아내고, 남들이 못 차는 것일수록 찾는데 기쁨을 느끼는 게 덕후다. 그런데 그렇게 생고생 개고생 다 해서 찾아낸 정보나 콘텐츠를 덕후는 혼자 방구석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좋아(할 수도 있겠지. 그렇겠지....)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기꺼이 꺼내어 알리고 자랑을 해댄다. 이보시오 사람들아, 내가 찾아낸 것 좀 보시오. 이런 덕후의 눈물겨운 (아무도 몰라줄 것 같은) 노력을 결국 아무도 몰라볼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그걸 누군가 발견하고, 어둠 속에서 발자국 소리를 내며 역광을 입고 걸어와 안경을 추켜세우며
'지나가던 사람이 오만 나도 저거 찾고 있었소..., 대단한 눈을 가졌군. '라고 해줄 때의 감동이란. 훗.
사실 나는 어떤 한 분야에 파고드는 덕후는 아니다.
12살 때부터 하루에 음반 하나씩 듣고, 하루도 새로운 음반을 안 듣는 날이라고는 거의 없지만, 나는 덕후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음악 전문가가 아니다. 철저하게 뼛속 깊이 아마추어다. 대신 이제는 그 어떤 음악을 들어도 그 음악을 처음 듣더라도 그 음반을 만드는데 관여한 사람들 중 하나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음악과 연관성이 있다는 정도라고 해두자. 그리고 나는 음악에 대한 나만의 관이 있다. 음악은 부피가 아니라 깊이로 듣는다는 그것인데, 한 곡을 들어도 그 음악에 대해 깊은 감명을 얻은 사람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맞다. 음반이 만장이 넘게 있어도 음악 귀한 줄 모르면, 그 사람은 그냥 수집가다. 많이 안다고 많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 그러나 많이 듣는 사람에게는 옥석을 가리는 재주가 생겨난다는 진리는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는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든 적이 있었다. 그리고 대학교 때는 아무리 돈이 없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극장을 갔다. 영화를 절대, 결코, 어둠의 경로로 보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극장에서 보거나 유료 다운로드해서 보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dvd를 사서 본다. 요새 웬만하면 유료 다운로드가 잘 되어있고, 유료 다운되는 것 중에서도 아직 예술 영화도 너무 많고, 또 영화제 가는 것도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즐거운 자극을 얻을 영화는 너무 차고도 넘친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넷플릭스도 그다지 흥미를 못 느낀다. 어찌 보면 드라마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영화만 하겠냐는 고리타분한 생각 때문에 드라마를 잘 안 본다. 그래서 TV도 없고 따라서 TV도 안 본다. 사람들이 '어제 그 방송 봤어?' 할 때마다 할 말이 없어진다는 점 빼곤 딱히 불편할 것이 없다.
어린 시절 나의 꿈은,
일주일에 한 권의 책, 한 장의 시디, 한 편의 영화를 마음껏 사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나는 그 꿈을 실현하며 살고 있어 행복하다.
정보와 다소 허접하게 하향 평준화된 콘텐츠의 양이 폭발하기 시작한 지금과 같은 시대일수록
장인은 더 귀해지고 그 가치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장인이 아닌데 너나 할 것 없이 장인 인양 포장하는 기술도 날로 늘어나는 듯 하지만, 역시 장인은 시간이라는 폭력으로부터 살아남은 강인한 사람에게만 붙는 이름이기 때문에 한 몇 년 해놓고 장인이라고 떠드는 사람을 신뢰할 수야 없지 않나.
장인을 장인으로 대접하는 시대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
다시 한번 덕을 갖춘 우리들의 차칸 친구, 덕후들의 존재가 새삼 절실해지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자신이 덕질 하는 주제에 다시 몇 가지 되짚어보자.
나는 덕질에 충분한/정당한 투자를 하고 있는가?
나는 덕질에서 어떤 가치와 기쁨을 얻고 있는가?
그 덕질은 나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을 주는가?
나는 같은 분야의 덕후를 만났을 때 그와 대등한 위치에서 한 수 겨뤄볼 수 있는가?
아니라면....
다시 한번 냉엄하게 나의 덕심을 되짚어 보고 냉수마찰과 지갑 충전을 하고 덕업 정진하는 계기로 삼아 마땅할지어다.
싸구려 콘텐츠의 갑질은 이제 그만,
자신만의 취향을 정성껏 가꾸면서 노동으로 지친 영혼을 위로해 줄 덕질의 시대로 우리, 힘차게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