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107일째
10월 8일 토요일 맑음
회사 후배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휴직 전부터 결혼식 날짜를 알고 있었고 직장 동료 중에는 꽤 자주 식사도 하고 친한 편이라 직접 참석하기로 했다. 원래는 내가 첫째만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결혼식장이 생각보다 집에서 먼데다 토요일마다 첫째가 다니는 영어놀이 센터 수업 시간과 겹쳐서 그냥 혼자 가게 됐다.
사실 내가 직접 결혼을 해본 이후에는 하객으로 참석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세웠는데 우선 첫 번째는 되도록 여유 있게 일찍 가는 것이다. 결혼식은 당사자에게는 일생일대의 행사다. 늦어서 중간에 들어가고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하는 것보다는 잠깐이라도 얼굴을 마주하고 축하 인사를 건네는 게 좋다. 두 번째는 직접 참석할 정도의 사이라면 축의금을 좀 넉넉하게 하는 것이다. 5만 원 할 사이면 10만 원 하고, 나한테 10만 원 준 사람이라도 내가 좋아하면 20만 원 하고 그런 식이다. 이것도 다 역지사지에서 나온 생각들이다.
오늘은 결혼식장이 역 바로 옆에 있기에 교통체증을 감안해 지하철을 타고 갔다. 일찍 도착해서 지하철에서 내리려는데 같은 칸에서 내리는 다른 직장 동료도 만나고 역에서 식장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임원 분도 만났다.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회사의 소식도 물었지만 막상 크게 달라진 게 없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일상의 사이클이 전혀 달라져서 시간이 오래 지난 것 같지만 실제론 회사에서 내가 휴직을 한 3개월 정도는 업무나 회사 경영 상황이 그다지 크게 달라질 게 없는 짧은 기간이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 100일이 다 되도록 키웠는데 회사라는 곳은 거의 그대로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축의금을 내고 예식장 앞 로비에서 서성이고 있으니 친한 회사 선후배와 임원분들이 속속 도착했다. 다들 오랜만에 만난 나를 반갑게 대해주었고 나는 둘째 사진을 보여주며 곧 100일이라며 근황을 알렸다. 사실 나 빼고 다른 사람들끼리는 금요일인 어제도 회사에서 마주쳤을 테니 별로 새롭게 할 얘기도 없었을 것이다. 원래 내가 속해있던 세상과 단절되어 거의 가족이나 이웃들과만 지내다가 다시 이렇게 '사회생활'이란 걸 해보니 마치 어디 무인도에 몇 달 갇혀있다가 탈출해 나 없이도 잘 돌아가던 세상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축제 분위기의 결혼식과 사진 촬영을 마치고 뷔페에서 한참 이야기에 열중하다 시계를 보니 12시 반 결혼식인데 벌써 2시가 되어 있었다. 최근 나보다는 아이들과 가족을 우선으로 스케줄을 짜던 시간적 공간적 제약 없이 오랜만에 내 개인적인 만남을 갖게 되어서 신이 났던 모양이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내가 포크를 놓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아 조금 머쓱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한 회사 선배가 데려다 주어 집에는 편하게 왔다. 아내가 장모님과 애들을 데리고 공원에 나와서 놀고 있었다. 결혼식장에서 회사 사람들과 있을 때 신이 났던 것 같은데 막상 가족들에게 돌아오자 더 마음이 편해졌다. 잠깐 머리를 비집고 들어오려던 회사와 일 생각은 잊고 원래의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왔다. 아무래도 역시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저 세상보다는 여기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