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109일째
10월 10일 월요일 추워짐
굉장히 큰 의미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쉽지 않은 날이었다. 오늘은 둘째의 백일 기념 식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생후 98일째지만 가족들의 일정을 맞추기에 좋은 공휴일 점심으로 약속을 잡게 됐다.
문제는 우리 둘째가 새벽에 수시로 깨는 바람에 내가 잠을 거의 제대로 못 잤다는 것이었다. 사실 첫째를 키우면서도 아주 힘들었던 징크스가 하나 있는데, 뭔가 중요한 날 전날에는 애가 꼭 잠을 잘 못 자고 부모를 힘들게 했었다. 이를테면 이직 후 첫 출근 날이라던가,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이면 꼭 새벽잠을 설치게 만들었는데 하필 이런 닮을 필요 없는 징크스까지 둘째가 닮아버린 것 같았다.
어쨌든 잠을 푹 못 잤어도 시간은 흐르고 아침은 밝았고, 모든 가족들이 모이는 식당 예약 시간도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에 아침부터 첫째는 동생에 대한 질투심을 대놓고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늘은 동생이 태어난 지 100일이 된 날이라 주인공이고 가족들이 축하해주러 모이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더니 자기도 100일 이란다. 그래서 너는 1571일이라고 하자 아니라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온 가족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100일 아가에 머물고 싶어도 인생은 흘러간단다.
오전에 장인 장모님이 우리 집으로 넘어오셔서 떡과 백일 상차림 등 짐을 싣고 식당으로 출발했다. 차로 10분 거리다. 가족이 다 모인 가운데 둘째는 귀여움을 발산하다가 분유를 먹고서는 우리가 식사를 하는 옆에 빈 공간에 누워서 잠을 잤다. 첫째는 뭔가 가족들이 예전만큼 자기를 주목해주지 않는 것이 아쉬웠는지 관종처럼 행동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주인공이 될 수 없음을 결국 받아들인 것 같았다. 코스요리 식사를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깬 둘째를 둘러싸고 돌아가면서 기념촬영을 했다. 이렇게 백일 기념 식사는 금세 끝났다.
집에 돌아오자 밀린 피로가 머리끝까지 올라오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셔도 카페인이 손끝까지 미치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금요일에 삐끗해서 어제 한의원 가서 치료를 받았던 목의 통증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목을 좌우로 돌려도, 고개를 들어도 숙여도 목이 아팠다. 다행히 온 가족의 관심을 받느라 지쳤는지 둘째도 집에 와서 숙면을 취하기 시작했다. 하긴 얘가 자꾸 깨서 내가 잠을 못 잤다는 건 이 녀석도 새벽에 잠을 푹 못 잤다는 거였다. 첫째와 아내가 노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나도 꿈이 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내와 첫째가 뭔가 실랑이를 하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아 또 왜 혼나고 있을까. 오늘 좀 힘드네. 라고 생각만 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가 처음 자기 시작한 지 한 시간 반 만에 깼다. 어느새 아내와 첫째는 다시 분위기 좋게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도 땀이 살짝 나게 숙면을 취한지라 나른하고 기분 좋게 일어났다. 유튜브에서 본 대로 수건을 둘둘 말아 베개 대신 베고 잤는데 목의 통증도 훨씬 좋아져 있었다. 어쩌면 이것도 그냥 잠이 부족해서 내가 제일 무리하는 곳에 문제가 터지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오늘 잠시 버거웠던 순간이 있었다. 졸리고 피곤하고 뒷목은 아픈데 백일 상차림 세트를 차에 싣고 첫째의 카시트를 떼서 트렁크에 넣는데 몸에 힘이 없는 것 같았다. 백일을 키웠지만 그건 이제 시작일 뿐이고, 1571일을 키운 애도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데 대체 언제쯤이면 좀 편해질까. 박지성이 육아가 축구보다 힘든 이유는 종료 휘슬이 없어서라고 하던데 정말 끝도 없는 연장전을 무작정 계속 뛰어야만 하는구나. 이런 생각들이 물밀듯이 머릿속을 헤집었지만 백일 기념 식사 자리에서 내색할 순 없었다.
하지만 낮잠을 자고 컨디션을 회복하자 일상도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아이들을 9시 반에 재우고 아내와 술 한잔을 기울이며 지난 100일간의 노고를 서로 치하했다. 우리 부부의 결혼행진곡은 비틀스의 오블라디 오블라다(Ob-La-Di, Ob-La-Da)였다. 그땐 아직 결혼도 안 해본 주제에 뭣도 모르고 그 곡을 결혼행진곡으로 골랐는데 참 지금 생각해도 최고의 선곡이었던 것 같다. 좀 힘든 날도 자고 일어나면 별 거 아니다. 입 밖으로 '오늘 좀 힘드네'라고 말하자 오히려 괜찮아졌다. 내일은 오늘보단 나아지겠지. 인생은 계속되기에 아름답다.
Ob-la-di, ob-la-da, life goes on, bra!
La la how the life goes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