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와우 Oct 15. 2024

두 번의 스물아홉을 지나며

일과 사랑을 위한 시간들

2024년, 아주 긴 여름이 지났고 마침내 쌀쌀한 가을 공기가 찾아왔다. 나의 2024년은 참 많은 일이 있었더랬다. 특히 '한 달'을 굉장히 짧은 시간으로 치부해 왔던 나를 시험에 들기라도 하듯, 한 달 동안 아주 아주 많은 일이 일어나던 해였다. 그 과정을 겪어가며 나는 고통스럽고, 또다시 괜찮아졌다.


어쨌든 이번 해는 만 30세를 지나오는 해였다. 2022년, 2023년은 내가 두 번의 스물아홉을 지나던 시기였는데, 모든 1년 1년도 여러 깨달음이 있었던 해였지만 이 두 번의 스물아홉 동안 나는 '오, 나 정말 모르고 살아왔구나'싶은 순간들이 많았다.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여전히 서툴기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한 시간들을 돌이켜 적어본다.


2022년, 한국나이 29살

- 여전히 나는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설레는지 알고 싶어


와, 내가 29살이라니! 성인이 되는 20살을 앞둔 19살과는 다른 마음이었지만 비슷하게 놀라운 나이였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마음으로 내 나이를 바라봤다. 어떻게 보면 어린 나이지만, 29살을 처음 겪는 자신에게는 아주 많아 보이기도 하는 나이였다. 이 시기의 나는 '진로'에 대해 여전히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19살보다는 확실히 경험도 쌓이고 알게 된 것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불안'이라는 건 더 업그레이드되어 어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것이 아니라 농익은 옷을 입고 '어이, 평온해보라지'하며 놀리는 듯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칼취업을 해서 이미 자리를 충분히 잡은 친구들도 있었지만, 이 시기의 '진로'는 여전히 친구들 사이에서 화두였다.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든,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든 말이다. '이 길이 맞나? 이 회사가 맞나? 내가 앞으로 여기서 평생 일하는 게 맞을까?' 등등. 진로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면 줄줄이 소시지처럼 자연스럽게 여러 이야기가 이어져 나왔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학생을 가르치며 돈을 벌기도 했고, 공기업 취업에 도움이 되는 자격증을 퀘스트를 깨듯 따내며, 나름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두 군데에서 '청년인턴'이라는 것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경험들은 내가 서둘러 진짜 좋아하는 걸 위해 용기를 낼 자양분이 되었다. 안 맞는 것을 생생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성적을 높여주면서, 공기업 인턴 일을 하면서 '이 일로는 내가 최선을 다해도 70점 만점으로 살겠구나' 이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통장 잔고는 어느 정도 안전하겠지, 그리고 부모님도 적당히 좋아하시겠지. 이 부분들이 70점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나에겐 비어있는 '30점'이 중요했다. 보람, 그리고 매번은 아니더라도 일을 통해 정말로 설레는 시간이 분명히 있어야 했다. 나에겐 그것이 중요한 가치였다. 그렇게 나는 이런저런 '이유'('변명'이 더 어울릴지도)로 미루고 있던 상담심리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나서 나는 내가 닮고 싶어 하는 모습의 어른들을 만나 설렜다. 다행히도 내가 입학한 학교는 나와 잘 맞는 학교였다. 마음에 대해 섬세하게 다루는 사람들, 나보다 먼저 더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더 다채로워진 사람들을 보며 '29살의 나, 새로운 도전에 기꺼이 용기내기를 정말 잘했다!'라고 자주 생각했다. 아, 그러나 "정말 100퍼센트 해피엔딩이었나요?" 하는 질문은 나중에 해주면 좋겠다. 현실적인 고민에 대한 부분은 또 할 얘기가 많다.


2022년의 나를 요약하자면,

29살이라는 나이에 놀라 내면의 욕망을 슬그머니 꺼내놓기 시작하다.

그리고, 불안하면서 동시에 신이 났다.


2023년, 만 나이 제도가 생겨서요. 다시 29살이 되었습니다.

- 결혼식 올리는 대학원생이 바로 나였다. 내가 선택한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다.


매일 새로운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은 나의 메마른 목에 촉촉한 물을 주는 듯했다. 신나게 대학원을 다니며 운이 좋게 상담 일도 시작하게 되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휴학을 하고 출산을 하는 선생님들은 꽤 있었지만, 학기 중에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은 내가 다닐 때는 나밖에 없었다. 학교에 조금 적응했다 싶은 4학차 가을에 나는 7년을 만난 애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거의 반 년동안 결혼식 기획을 짰다. 직계가족, 친인척 중심으로 총 30명이 안 되는 인원이 모여서 하는 스몰웨딩으로 진행했으며 꽃 종류부터 음악 선정까지 우리 마음에 쏙 들게 진행했다.

사실 학교 과제, 시간제 일, 결혼 준비로 바쁘기도 스트레스도 많이 받던 시기였다. 어떻게 보면 무모해 보이는 시기에 내가 결혼을 한 이유는 우리가 이미 풍족해서가 아니고, 내 직관이 이 사람과 결혼하라고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사람이랑 평생 수다를 떠는 짝꿍이 되고 싶었다. 결혼 준비과정에서 결혼과정에 대한 질적 연구를 해볼까 싶을 만큼 제도와 과정 자체에 여러 의문과 생각도 들기는 했다. 어쨌든 그 과정들을 지나 현재는 서로 선택한 가족이 되어 살고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 그리고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이 사람은 요즘의 나에게 제일 큰 영감이 되고 있다.


프로이트는 일과 사랑이 삶의 전부라고 말했다. 나의 두 번의 스물아홉은 나의 일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나의 애씀의 시기였다. 당시에는 많이 불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의 손을 잡아주며 "괜찮아, 해보고 나면 또 다른 길이 열려"라고 말해주고 싶다. 용기를 내 몸으로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지. 그리고 결혼을 준비하며 인생의 시기의 중요성을 느끼기도 했다. 인간의 성장에도 시기가 중요하듯, 관계에서도 시기가 참 중요하구나 싶다.

내가 결혼을 하며 원한 건 이런 소소한 행복들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