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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Feb 23. 2023

뜨거운 절망


흰 벽이었다. 코끝에 닿은 차가운 벽을 따라 목을 꺾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은 벽. 숨이 막혔다. 뚝뚝 무언가 물로 떨어지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내가 걸어온 길들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 밑은 바다. 거친 물살이 초록빛 칼날이 되어 서로를 가르고 있었다. 뚝뚝, 투둑 흙들은 부서지고 발끝에 흙들이 매달렸다. 벽, 흰 벽만이 단단했다. 혹시 잡을 것이 있을까 벽을 더듬었지만 매끈했다. 어떤 틈도 주지 않고 하얗게 찼다.


밤마다 시달렸다. 잠자리에 들면 어김없이 흰 벽이 눈앞에 섰고 발아래가 무너졌다.


"내 인생은 언제나 예감 혹은 암시에 앞이마가 얻어터지고 기억에 뒷덜미를 물렸다."

  - 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p. 24.


최승자 시인의 책을 붙잡고 인생에 매달렸다. 그리고 얻어터진 앞이마를 쓰다듬었다. 이젠 그만 물으라고 기억을 자르고 잘랐다.

몸으로 글을 쓰는 사람. 최승자 시인은 몸이 깨달은 것만을 쓰는 사람이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몸에 박힌 상처들을 뽑아 글로 써 내려갔다. 그래서 나는 한 챕터를 읽고 '눈 가리고 절망하기, 눈 가리고 희망하기, 아옹! 아옹!( -같은 책 p. 22)'거렸다. 내 밑의 흙은 계속 떨어져 나가는데 나는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뜨거운 절망! 타들어 가는 심장이 그렇게 말했다. 쇳소리를 냈다. 놀라 일어나 앉으면 발밑의 바닷물이 심장에서 출렁거리고 있었다.

건강검진을 받았다. 이유를 찾았다. 원인을 분석해 보았다. 그럴수록 기억들이 달려들었다. 내 인생 최대의 빌런은 바로 나였다. 겁 없이 나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무릎으로 뒷걸음을 쳤지만 어딜 가냐고 내가 나를 조여왔다. 어쩔 수 없다. 나란 녀석 마주 볼 수밖에.

발 밑의 마지막 흙이 부스러졌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초록 칼날 속으로 떨어지는 나. 그런데 궁금하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손을 내밀지도 않고 벽 어디선가 고개만 내밀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시간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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