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와의 전쟁
자대에 오고 나서 처음 흉부 통증이 발생한 후 국군수도병원으로 지속적으로 외진을 다니고 있다. 여 댓 번이 넘으니 정해진 패턴이 만들어졌다. 우선 버스에서 내려서 코로나 문진표를 작성하여 건물 출입을 자유롭게 하고, 주차장 옆의 흡연구역에서 담배 한 개피를 피고, 선탑 간부에게 말하여 정신과로 동행한다(대체 왜 정신과를 가는데 간부가 동행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가장 최근에 간 외진에서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그날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들고 가서 읽고 있었다. 소련 여성들의 목소리로 말하는 전쟁(어떤 말로 이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작가도 그들의 고통에 대하여 극화를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예의를 갖추는데, 내가 여기에 어떤 수식을 붙일 수 있을까?). 요즘은 전쟁에 대한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때문인지 그냥 지나갔던 것이 눈에 밟혔다. 흡연구역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고개를 드니 코로나 관련 현수막이 보였다. 현수막(코로나 발발 1년이 넘은 지금으로부터 한참 전에 붙여져 있던 것 같았다. 빛이 많이 바랬다)에는 "#우리는_코로나를_이겨낼것입니다 -의무사령부"라고 쓰여 있었다.
현수막을 기획한 사람이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국군이 주체가 되어 이긴다라는 표현을 쓰니 전쟁의 은유가 떠올랐다. ‘코로나와의 전쟁’. 비단 군당국뿐 아니라 정부 당국부터 언론과 일상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는 관용구가 되었다. 실제 심각성의 정도와 관계없이 이 전쟁이라는 은유는 극적인 효과를 낳는다. 매우 중요하고, 결연하고, 비장한 무엇인가가 되었다.
‘코로나와의 전쟁’. 전쟁은 적을 필요로 한다. 적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분노와 적대를 투시할 대상은 어디 있는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 아니다. 아무 데도 없다. 그러나 적으로 만들어지고 지목당하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이태원의 한 클럽에서 확진자가 발생했을 때, 국민일보는 그 클럽이 동성애자 남성들이 이용하는 곳이라는 것을 밝혔다. 마스크 미착용이나 밀폐된 실내공간에서의 밀집 등 안전하지 못한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이 문제가 되었다(물론 안전하지 못한 행위가 확진의 결과를 낳는 절대적인 요인은 아니며, 일말의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확진자들을 향한 차별과 폭력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이 문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혐오가 재작동했기 때문이다. 남성 동성애자들에 대한 혐오를 구성하는 한 축은 HIV/AIDS와 관련이 되어 있다. 즉, HIV/AIDS라는 “성병"과 게이들의 항문성교를 연결시켜서, 점액질과 정액, 피와 배변 투성이인 이미지를 생산한다. 이렇게 사회적 혐오는 생물학적 혐오의 기제를 차용하고 확장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가 비말(침)로 전파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확진자 자체에 대한 혐오와 차별, 배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기존의 혐오 대상이 되는 특질과 만나면 더욱 강화된다.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어떻게 지칭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한국의 보수매체는 바이러스를 처음 환자가 나온 중국 우한 지방의 이름을 따서 “우한 폐렴”이라고 불렀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020년 3월 17일 트위터를 통해 “Chinese Virus”라 불렀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근원지라고 지목된 우한의 야생동물 시장은 피와 배설물 등 더러운 것들이 범벅이 된 이미지로 전시되었다. 이는 한국에서 중국인에 대한 주된 혐오 서사 중에 하나인 위생과 관련한 문제를 건드린다.
특히 미 대통령의 “Chinese Virus”라는 표현은 제국주의적 서사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다. 다음은 George Dee Magic Washing Machine Company의 광고다. 광고는 1882년 중국인입국금지법을 인용하며 중국인 ‘세탁’ 효과를 선전한다. 발생한 지역의 이름을 붙인다는 단순하고 순진한, 그리고 순진해서 더욱 악랄한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우한 폐렴, “Chinese Virus”는 모두 중국인과 비위생적인 것을 연결시키고 혐오의 수사를 생산/재생산한다.
우리는 지금 확실히 코로나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리고 그 적은 외국인과 이주민, 성소수자들 등등 우리의 이웃이다. 우리는 이들을 ‘위기’로 취급하고 '극복'하려 하는가. 우리는 극복이 아니라, 전쟁이 아니라, 회복이라는 관점으로 이 위기를 다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무너져 내린 일상과 그 일상을 먼저 겪은 사람들, 그들과 함께 다시, 회귀가 아니라 회복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전쟁이라는 은유를 다시 한번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