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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치병 환자에 대한 대우의 문제
롤랜즈는 평등원칙과 응보원칙을 배합한 원칙이 모든 윤리 이론이 받아들이는 일종의 토대라고 설명한다. 평등원칙이란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면 윤리적 대우에서의 차이도 없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때 유의미한 차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를 보완하는 것이 응보원칙이다. 응보원칙이란 ‘개별자가 결정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발생한 차이로 윤리적 대우에서 차이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이 둘을 배합하면 “각각의 개별자들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배려의 양에 차이가 있다면 이러한 차이가 ‘자신이 직접 획득하거나 유발하지 않은 요인’에 의한 결과여서는 안된다”는 원칙이 나온다. 긍정적으로는 그 개별자의 통제를 벗어난 요인에 의해서 보다 많은 윤리적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나 롤랜즈는 부정 논변에 대해서는 동의하면서도 긍정 논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다. 이 해석을 받아들이면, 난치병을 얻은 사람에 대한 배려와 도움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긍정 논변에 오류가 있다 생각한다. 나의 입장은 긍정의 결론, 즉 ‘그 개별자의 통제를 벗어난 요인에 의해서 보다 많은 윤리적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동의한다. 이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난치병 환자에 대한 “배려”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롤랜즈의 논변은 이렇다.
1. 각각의 개별자들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배려의 양에 차이가 있다면 이러한 차이가 ‘자신이 직접 획득하거나 유발하지 않은 요인’에 의한 결과여서는 안된다
2. 난치병은 그 개별자의 통제를 벗어난 요인이다.
3. 따라서 난치병 환자들에 대한 배려는 옳지 않다.
여기서 그 배려는 온정주의적이고 시혜적인, 추가적인 것으로 파악된다는 점이 문제다. 난치병 환자들은 추가적인 배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에 대한 배려(라고 불리는 것)는 당연한 것이다. 이 논변을 수정하면 이렇다.
1. 각각의 개별자들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배려의 양에 차이가 있다면 이러한 차이가 ‘자신이 직접 획득하거나 유발하지 않은 요인’에 의한 결과여서는 안된다
2. 난치병은 그 개별자의 통제를 벗어난 요인이다.
3. 따라서 난치병 환자들이 병력에 의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삶에의 동등한 참여를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상상하는 그들에 대한 배려, 예를 들어 의료비를 지원해주는 것이나, 생계비를 지원해주는 것이나, 문화공연을 열어주는 것이나, 대중교통 등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애초에 그들 또한 적절한 접근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교통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일 것이다) 등은 추가적인 배려가 아니라 오히려 차별을 시정하는 조치이다. 그들은 고통에서 자유로울 권리와 생계를 보장받을 권리, 문화생활을 누릴 권리, 대중교통을 이용할 권리 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속성에 의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삶에의 동등한 참여를 방해받아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그들을 위한 차별 시정 조치를 시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2. 도덕적 능동과 피동의 문제
그는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즉 이성이 있고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고 평가할 수 있는 도덕적 이성적 능동인과 그렇지 않고 도덕적 행위의 대상이 되는 도덕적 피동인으로 도덕의 대상들을 구분한다. 롤즈의 본래자리(롤즈의 원초적 상황에 대한 롤랜즈의 대안)란 기본적으로 능동인들에게만 열려있기 때문에, 무지의 베일에 이러한 능동성 또한 포함시켜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때 도덕적 피동인의 예시로 “심각하게 뇌가 손상된 사람, 뇌 기능에 이상이 있는 사람, 영구 정신이상자, 단기 정신이상자, 노인, 유아, 어린아이”를 꼽는다.
이러한 구분이 권력과 담론 그리고 몸의 관계에 대한 정보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예시로 든 존재들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박탈할 수도 있다는 위험이 있다 생각한다. 즉, 이성이란 무엇인가 다시 질문해야 하지 않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권력과 담론이 정상적이라 생산하는 몸과 정신을 갖는 사람들만이 이성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3. 죽음의 우선성 문제
그는 동물권이 자주 부딪히는 반론이자 비아냥인, 동물을 인간과 동일하게 대해야 하느냐는 억지 주장에 반대하기 위하여 구명정 논증 속에서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차이를 설명한다. 죽음과 삶의 순간에서 누구에게 우선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답을 하면서 인간과 동물의 우선성 차이를 발생시키는 요인은 무엇인지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죽음이란 어떤 대상의 권리 혹은 이익을 빼앗아가는 것(일종의 해악)이라 이해해야 하는데, 그 해악의 대상이 죽음의 순간에 소멸되므로 죽음은 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뺏는가의 반론이 제기된다. 롤랜즈는 이를 미래와 연관하여 해결한다. 이때 미래란 어떤 존재가 실제로 갖는 것이고, 죽음이 그 존재에게서 이 미래를 빼앗아가는 것이라 해석하면 또다시 문제가 생긴다. 어떤 존재에게 미래가 있다는 것은 잠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앗아가는 죽음 역시 잠재적인 해악이 된다.
롤랜즈는 이를 미래를 갖는 상태를 박탈한다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미래를 갖는다는 것은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상태의 개념이다. 즉, 욕망이나 목표, 계획을 갖는 대상은 미래에 대한 어떤 감정 상태를 소유한 것이고, 죽음이 박탈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어느 시점 T에서’ 한 개인의 삶의 가치는 그 개인을 기다리는 미래의 길이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상황에서 가치를 생산하거나 보호하는 것에 일차적 관심”을 두고 평가했을 때도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면 이 가치가 실증되는 시점에 2차적 관심을 둘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미래의 양과 질을 죽음 결정 논의에 개입시킬 수 있다. 여기서 그 대상이 자신의 미래에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얼마나 긴 미래와 연결되어 있는지로 판단을 할 수 있다. 이성을 가진 도덕적 능동인의 경우, 미래를 인지하고 보다 복잡하고 긴밀한 연결이 가능하다. 즉,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에 투자를 하는 행위나 감정상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비해 도덕적 피동인(여기서는 동물)들은 미래에 투자하기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거나, 미래를 인지하거나, 미래와 복잡하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으므로 도덕적 능동인에 비하여 죽음으로 잃을 해악이 적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미래에 대한 투자를 많이 하는 존재가 그렇지 않은 존재들에 비하여 죽음으로 인하여 잃을 것이 많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삶의 가치가 더욱 뛰어나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억압적 환경에 의하여 욕망이 단순화된 사람들의 경우는 삶의 가치가 낮다고 할 수 있을까? 즉, 군대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제1욕망인 나와 인수합병과 상장을 앞둔 회사를 소유한 자본가에게 죽음이 다가온다면, 자본가의 삶의 가치가 더욱 크다는 것인가?
결국 욕망, 미래, 투자 등에 대한 가치평가를 내려야만 죽음에의 논의에서 적용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그러한 것들에 대한 가치평가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