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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픈 비건 Oct 31. 2020

작년 여름, 국회 앞에서

Act If You Care

작년 여름, 지금 활동하고 있는 개농장 구조 단체와 첫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국회 앞 교통섬에서 갈 곳없는 개들이 임시 견사에서 지내고 있으니, 밤새 이 개들을 지켜줄 봉사자를 찾는다는 글을 보고 찾아가게 되었다. 딱히 할 일이 없는 대학교 4학년의 방학이기도 했고 무슨 사연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봉사를 신청하고 찾아가게 되었다.


거기에는 우리가 흔히 '시골 똥개'라고 부르는 개들이 몇 십마리씩 있었다. 개들의 사연은 참으로 기구했다. 고기로 태어나 평생을 뜬장 밖에는 나가본 적도, 깨끗한 물을 마셔 본적도 없이 살아가던  불법 개농장의 개들은 해당 농장이 위치한 토지의 용도가 변경되면서 신고가 들어와 개농장 폐쇄와 함께 모두 도축장으로 바로 끌려가야할 신세가 되었다. 어떻게 한 마리씩, 두 마리씩 구해보자고 활동가들이 개들을 구조하기 시작했지만 구조한 개들 중 한 마리는 사료를 먹고서는 처음으로 들어온 제대로 된 음식물에 내장에 녹아버려 죽었다. 그만큼 심각한 상태의 개들이였고, 그런 개들이 수십 마리가 있었다. 농장주는 당연히 개들을 모두 도축장에 팔아넘기려고 했다.


그러던 중 이를 너무 안타깝게 여긴 한 교수님이 큰 금액을 지불하고 농장주로부터 64마리의 개들을 통째로 구매했다. 몇 천만원의 금액을 지불하고 기적적으로 개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이 개들은 갈 곳이 없었다. 유기견이 아니기 때문에 보호소에도 갈 수 없었고, 그렇게 큰 덩치를 받아줄 수 있는 보호소도 없었다. 그렇게 개들은 양산에서 서울의 국회 앞까지 먼 길을 와 임시 거처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고, 봉사자들과 활동가들은 매일매일 개들 곁을 지켰다.


양산 개농장에서 구조되어 나의 첫 임시보호견이 되어준 '클로이', 지금은 미국에서 행복한 견생을 살고 있다.


초복에는 봉사자와 활동가가 함께 모여 불법개농장과 개식용 반대에 관한 시위를 벌였는데, 가까스로 죽음에서 벗어난 그 개들이 있는 자리로 와서 육견협회에서는 개고기를 먹는 맞불시위를 했다. 개들은 냄새에 예민해서 '개장수'나 '개고기' 냄새만 나도 자지러지게 울면서 벌벌 떨었다. 그때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저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굳이 여기에서, 여기까지와서 이런 짓을 하는걸까?



날은 저물고 그 사람들은 떠났지만 개들을 지키는 봉사자들은 그 뒤로도 몇날 며칠을 개들을 지켰다. 그리고 개들은 기적적으로 하나 둘씩 가족을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너무 큰 덩치에 한국에서는 천대받는 '진돗개'라 해외로 입양을 가게 되었지만 국내에서 입양 가족을 찾은 개들도 적지 않았다. 걷는 것도, 뛰는 것도, 사료와 간식을 씹는 것조차 어색해 하던 그 개들은 지금은 완벽한 집 개가 되어 쇼파와 침대 위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64마리 개들이 모두 갈 곳을 찾을 때까지 사람들은 그곳을 지켰지만 개고기 먹는걸 보여준다며 그 앞에 오는 수고를 또 하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 때 깨달았었다. 무언가를 죽이려고 모인 사람들은 무언가를 살리려고 모인 사람들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그만큼 간절하지 않으니까. 문득 고기를 먹지 않는 것에 대하여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가끔 사람들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몰래 고기를 먹냐거나, 먹고 싶지 않냐고 묻곤 한다. 글쎄, 고기가 먹고 싶은 적은 없다. 고기가 '맛있겠다'라는 생각은 물론 자주 한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먹고 싶다로 옮겨가지지 않는다. 몰래 고기를 먹냐고? 아니, 차라리 고기를 먹는다면 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 오늘은 고기 먹을래. 먹고싶어' 라고 말하고 먹을 것이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내가 인지하고 저지르는 '해'가 아니라 비록 아주 작을지라도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저지르는 무지의 '해'이다.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은, 비건들은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할 수 있냐, 없냐의 문제를 떠나 이미 육식이 삼시세끼 테이블에 오르는 것에 맞춰진 현대의 식탁문화에서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친구들이 비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면 고기를 먹는 것 자체보다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서 겪어야 되는 번거로운 일(외식, 회식, 성분표 확인) 때문에 비건을 실행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건들은 일일히 알레르기 성분에 표시되지 않은 동물추출 성분표까지 정리해가며 공유하고 그 성분을 입에 대지 않는다. 왜?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이제 알아버렸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간절하니까. 우리는 무언가를 살리고 싶으니까.


나 역시 아직 너무도 어설픈 비건이지만 너무나 간절한 마음이 종종 세게 내면에 들이닥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곁에 항상 많았다는 것이 이제서야 조금씩 선명하게 보인다. 내가 외면하기를 멈춘 바로 그때부터. 완벽할 필요는 없다. 단순히 육식이 나쁘다거나 오리털 이불을 쓰지 말라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개만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개'라도 먹지 말자는 것이고, 최소한 '개'가 우리와 똑같이 고통받고 느끼고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몸소 느껴봤고 알고 있다면, 개부터라도 먹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나쁜 것은 모르는 것이다.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나쁘다. 모른 척 해버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죽음이니까. 알고 나서의 선택은 본인의 자유. 돼지도, 소도, 물고기도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는 것은 본인의 소관. 어디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인지는 온전한 본인의 선택이며 어떤 사실이나 근거도 한 개인의 모순됨을 꼬집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니까.


그렇지만 만약 몰라서 하고 있다면, 혹은 당연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쁘다. 불필요한 고통을 계속해서 유발하는 것, 잔인해지기란 생각보다 쉽다. 하지만 결국에 우리는 그 무언가를 살려내고 말 것이다. 무언가를 죽이려는 사람은 무언가를 살리려는 사람을 절대 이길 수 없으니까. 우리가 훨씬 더 간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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