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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픈 비건 Mar 23. 2022

작은 고추의 위험성에 관하여

이것은 하나의 작은 고추와 슬픈 사랑 이야기이다. 


물론 작은 고추에 관해서라면 여러 편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쓸 수 있겠지만 19금 게시판이 아닌 이 곳에서 해 볼 이야기는 그 고추 이야기는 아니다. 다른 고추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작은 사과로 글을 시작한다.


불과 며칠 전 일이다. 동네의 작은 단골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참고로 가게 이름이 정말로 '단골집'이다. 그리고 실제로 나의 '단골'집이기도 하다.) 조금씩 시간이 늦어져 가고 손님들은 슬슬 빠져 나와 내 옆 테이블밖에 손님이 남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보니 나도 모르게 옆 테이블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되어버렸다. 


몇 년쯤 사귄 커플일까? 대충 보기에 편한 차림으로 만난 것으로 보아 꽤나 연차가 되어 보이는 커플로 보였다. 둘은 서로에게 익숙해 보였고 익숙함에 약간 지쳐 보이기도 했다. 나는 오늘 처음 만난 남자와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 테이블의 분위기는 우리 테이블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였다. 어쨌든 우리는 감자전을 시켰고, 거기도 감자전을 시켰다. 


단골집에서 감자전을 시키면 청량고추가 송송 썰어 담긴 맛간장이 같이 나온다. 그냥 양조간장이나 국간장 말고, 그렇다고 튀김 찍어 먹는 너무 달달한 간장 말고, 전을 찍어 먹기에 딱 적당한 맛의 짭쪼름하고 알싸한 간장. 감자전을 몇 개 시키든 간장 그릇은 한 개가 나오고, 우리는 아직 동시에 간장을 찍게 되면 약간 어색한 사이였기 때문에 가끔씩 정적이 흘렀고 그 정적 사이로 옆 테이블의 대화가 계속해서 흘러들어왔다. 


옆 테이블에서는 이런저런 기억에 남지 않는 (나에게는) 쓸모없는 대화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자가 감자전을 집었고 남자가 친절하게 간장 속에 담긴 작게 썰린 고추 하나를 집어서 올려줬다. 고추가 얹어진 감자전을 한 입 하더니 여자가 말했다.


여자: "아, 고추가 맵다."

..

..


남자: "넌 맨날 그런식이야." 


(?????)


갑작스러운 '그런식' 선고를 받은 여자는 몹시 당황했다. 뭔가 상황을 수습할 새도 없이 분위기는 급격히 험악해졌고 그들은 이별 위기에 놓여졌다. 급전개된 상황을 우리는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넌 그게 문제야.. 넌 항상 그런식이야. 넌 내가 뭘 해줘도 항상, 매번, 이런 식으로 말해."

"아니, 자기야... 난 그냥 고추가 매워서 맵다고 한 것 뿐이야."

"지금 고추 얘기 하는게 아니라니까? 너가 항상 이런 식이라고."


그렇게 고추 논쟁은 그들의 일상에서의 연애 영역 전반으로 주제를 옮겨가게 되었고 얼떨결에 여자는 차일 위기에 놓이며 눈물까지 그렁그렁 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재미로 지켜봤던 우리도 이제는 안타까움에 같이 어쩔 줄을 모르며 곁눈질로 테이블을 지켜보았다. 남자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담배를 피러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여자는 고개를 돌린채 눈물을 훔쳤다. 이 빌어먹을 미각.. 매운 것을 맵다고 했을 뿐인데 거기서 상황이 이렇게까지 전개될 줄 누가 알았을까? 아주머니가 그날 조금 덜 매운 고추를 썼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만약 둘이 감자전 대신 두부김치를 시켰더라면? 아니다, 아싸리 안전하게 과일화채를 시키는 편이 좋겠다. 하지만 만약 남자친구가 한 입 떠 먹여준 황도가 너무 차가웠다면?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찾아 여자도 자리를 떴고 둘은 곧이어 다시 테이블로 함께 돌아왔다. 남자는 화를 낸 김에 화를 더 내는 사람처럼 잔뜩 화가 나 있었고 여자는 운 김에 더 우는 사람처럼 눈가가 시뻘개져 있었다. 둘은 싸운김에 계속 싸우는 사람처럼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언쟁했다. 남자는 싸움에 굶주린 사람처럼 진정할 줄 몰랐고 여자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종료하고 싶어서 사과했지만 무슨 말을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넌 항상 그런식이야'뿐이였다. 세상에 이 말을 이길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우리는 모두 '그런식'으로 밖엔 살아가지 못하는 '그런'사람들인걸.. 어쩌면 그 그런식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것 아니던가.


나는 이 싸움이 어디서 끝이 날지 궁금해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맥주를 한 병, 두 병, 세 병, 네 병.. 비워갔고 조금씩 취해가기 시작했다.


코로나 시대에서는 싸움도 조금 더 빨리 끝나는 법.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하는 영업 종료 시간에 맞추어 상황은 일단락 된 듯 보였다. 물론 이 싸움은 술집을 나와서도 한참을 계속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저 커플은 대체 어떻게 될까 ㅡ 하고 궁금해하며 술집을 나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맞고 가기엔 조금 많은 정도. 아끼는 옷을 입고 왔다고 하니까 냉큼 자기 옷을 벗어주었다. 이 사람, 아주 다정하구만. 다정함에 반해 두 번 만나고 세 번도 만났다. '소개팅을 하면 세 번쯤 만나면 사귀어야 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대.' 라고 걔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도 세 번 정도 만났을 때부터 사귀기로 했다. 


하루는 고추 커플을 회상하며 그 커플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지 얘기해보았다. 


'아무래도 헤어졌겠지?'

...

'있잖아.. 우리는 싸우지 말자.'

'그래, 우리는 그런 사소한걸로 싸우지 말자.'


모든 사람들은 그럴듯한 계획을 세운다. 쳐맞기 전까지... 지금의 그런식인 서로를 좋아하게된 우리도 언젠가는 그런식인 서로 때문에 작은 고추를 가지고 싸우게 될까? 이왕 싸우게 된다면 작은 고추보다는 조금 더 그럴듯한 사건으로 싸우는 편이 좋겠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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