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연애고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설픈 비건 Feb 03. 2020

틴더의 사랑

바야흐로 어제 저녁 간만에 친한 친구들과 거하게 새벽 4시까지 술을 먹고 한참 즐겁게 놀다 집으로 돌아왔다. 분명 10분 전까지 '연애 같은 건 필요없어 역시 친구가 최고다!!' 라며 떠들었는데, 웬걸 컴컴한 집에 들어서는 순간 우정이 최고라는 생각은 바로 부서진다. '아... 외롭다.' 간만에 동네 남정네들 구경이나 해보자 생각하며 틴더를 킨다.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해 본 사람은 없다는 전설의 데이팅 앱. 데이팅 어플은 인류의 영원한 난제인 사랑으로 돈을 버는 망할래야 망할 수 없는 어플이다. 사진 몇 장 보고 왼쪽으로 화면을 넘기면 영원히 볼 일 없는 사람이 되지만 오른쪽으로 넘기면 희박한 확률로 한 침대에서 일어날 사이가 될 수도 있다.


내 검지의 지문에 모든 걸 맡긴다.


성비는 아마도 9:1쯤 되려나? 아니면 9.99: 0.01쯤 되려나. 당연한 얘기지만 틴더에는 남자가 훨씬 많다. 여자라고 덜 외로워서가 아니라 여자에게 이름도 성도 몰라요의 남자를 어플로 만난다는건 때로는 목숨까지도 감수해야할만큼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몇 번씩 무서운 상상을 하다가 (또라이를 만나 쳐 맞는다거나, 강간을 당한다거나, 몰카를 당한다거나)  됐어 긍정적으로 생각해볼래!! 하는 미친 낙관주의로 이 어플을 가입하는 것이니라. 아 여자로 살기에 이 뭐같은 세상이여. 하지만 그렇게 목숨까지 걸고 열심히 검지로 화면을 넘기는 나를 보자니. 이 뭐같은 세상보다 더 뭐같은 나의 외로움이여..


평소 같으면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검지를 놀릴텐데, 취해서 빨리 아무나랑(아무나지만 진짜 아무나 말고) 아무대화(아무대화 아니고 나를 찬양하고 욕망하는)를 하고 싶은 나는 평소보다 관대하게 화면을 오른쪽으로 넘겼다. 우수수 쏟아지는 매칭틈에서 그게 그거같은 대화가 걸려오기 시작한다. 틴더의 속도는 다른 어떤 인간관계의 속도보다 빠르다. 이 새끼들은 인사나 자기소개도 없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어디사세요? fwb구하세요? 만나실래요?) 하긴, 여기서 이름이 어쩌고 성격이 어쩌고 하는 일이 어쩌고 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대체가능한 a,b,c,d 중 한 명일 뿐이다.


이 대체가능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은 순전히 운이다. 그냥 괜시리 대꾸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대꾸하기 싫은 사람이 있다. 영혼이 티끌만치도 담기지 않은 대화를 하다보면 내 손톱 사이에 낀 때 하나가 더 중요하다. 멍하니 천장을 좀 바라보다가 심심해지면 답장을 하다가 다시 현타와 함께 천장을 보다가 답장을 하다가를 반복한다.


그런데 대체가능 a,b,c,d 중 열렬한 경쟁자 한 명이 눈에 띈다. 그 사람은 매칭이 되자마자 장문을 보내기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ㅇㅇ라고 하는데요, 초면부터 이런 거 보내면 당황스러운거 아시겠지만 어쩌고 저쩌고 진짜 제 스타일이여서 (현대사회에서 사진을 믿다니) 이렇게 길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어쩌고 저쩌고 저는 어디에 사는데 키는 몇이고 운동도 좀 많이 했고 꽤 괜찮아요 그렇다고 제가 가벼운 만남을 원해서 이러는건 아니고요 (맞잖아)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열심히 말을 건내는 사람은 간만에 본다. 뭐지 오늘 처음 가입한 사람인가? 프로필을 클릭해보니 그럭저럭 평범하고 무난해보인다. 대충 귀찮고 뭐라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아~ 네 ^^ 라고 대답했다. 또 답장이 온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지금 안 주무시는것 같은데 밖에서 맥주라도 한 잔 어쩌고저쩌고 절대 이상한 의도가 있는건 아니고 부담스러우시면 다음주에 어쩌고 진짜 제 스타일이라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아서 어쩌고.. 그렇게 구구절절 주저리주저리 애쓰는게 순진해 보여서 뭐라 지껄이나 계속 대꾸를 하며 냅둬보았다. 그렇게까지 허튼소리라도 지껄이는 노력이 가상해보인다.


에휴 내가 또 뭔 짓을 하고 있지. 슬슬 모든 대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되어 다 씹기 시작했다. 다른 상대는 대체가능한 b,c,d,e, 매칭 상대에게 넘어가 더 이상 메시지가 오지 않는데 이 노력파 사람만이 계속 말을 건다. 너무 귀찮기는 한데 그래도 저렇게 길게 타자를 치는데 무시하기가 좀 그렇다. 만날 생각은 없는데.. 나는 계속 말을 빙빙 돌리며 좀 꺼져라 라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꽤나 무례하게 굴어도(아~ㅋ 전 관심없어요, 저 술 끊었어요, 저 이제 이사가요, 저 번호 없어요 ㅎㅎ) 이 사람 포기를 모른다. 그래 그만 대꾸하자 싶어 그냥 씹기 시작했다. 클릭은 하지 않고 화면창으로만 뭐라고 오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그러지 마시고 한 번 저를 만나보시면...

- 저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ㅠㅠ

- 그냥 한 번 만나보는게 소원이예요


급기야는 사진만 봤는데 사랑에 빠진 것 같다는 궤변을 늘여놓기 시작한다. 자기도 자기가 진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같이 뭘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번 만나게만 해달라고..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좀 마음이 동한다. 내가 뭐 얼마나 잘났다고 저 사람이 저렇게까지 애원하는데 무시하는거지. 저 사람도 귀한집 자식일텐데 이렇게 인터넷 어플에서 개무시당하는 걸 어머니가 보면 얼마나 속상하실까..? 라는 생각이 들어 답장을 하려고 클릭하려던 순간..


- 됐다.. 성격 개차반일 것 같은데 만나서 뭐하겠냐


라는 메시지가 오더니 매칭이 끊기고 대화창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성격 개차반인거 맞긴 한데.. 어떻게 알았지.. 시발.. 아니 너 방금까지 나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며, 한 번 만나보는게 소원이라며! 밀려오는 현타와 함께 또 어플을 탈퇴했다. 이제 다시는 안해야지 (물론 다음날 바로 다시깜) 라는 생각과 함께.


침대에 누워서 어플로 장을 보다 마지막에 왠지 다 필요없는 물건 같아서 장바구니를 비웠다. 가보고 싶었던 카페를 검색해 구경하다가 왠지 벌써 가 본 것 같아서 그냥 낮잠을 잤다. 나한테 성격이 개차반이라고 보낸 그 사람도 같은 기분이였으려나. 검지 두개로 열심히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자니 이미 나를 만나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수 있지 뭐.


그런데 날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한테 차였는데, 어떻게 알고 내가 실제로 차일 때 듣는 말을 했지??


예상치 못한 이별에 한 대 쳐 맞은 오늘은 얌전히 우리집개나 안고 자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