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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링 Sep 07. 2023

칼 갈아 드립니다.

집 앞에 장이 선 날이었다. 

입구부터 두 줄로 죽 늘어선 상점에서 맛있는 냄새와 김이 길게 이어졌다.

매콤함과 달콤함이 황금 비율로 섞인게 분명한 닭강정 가게를 시작으로

큰 솥에서 경쟁하듯 포근포근 해지고있는 옥수수와 만두를 지날 때,

뿌연 김 사이로 작은 입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칼 갈아 드립니다."


수제로 만든 것이 분명해 보이는 투박한 나무간판 위에 

단정하고 개성있는 글자 일곱개가 눈에 띄었다.

 

‘번쩍번쩍 잘 갈아 드립니다.' 

'집나간 칼도 돌아오는 솜씨' 

'써는 힘이 달라요.’ 등의 미사여구 하나 없이 

담백하게 사실만 적혀있는 그 간판은 되려 신선해서 

보는 사람의 시선을 잡아두는 힘이 있었다.


간판에서 두어 발짝 떨어진 곳에 주인의 등이 보였다.

주인은 손님이 오는지 가는지와 상관없이 거리를 등지고 앉아

자기 앞에 주어진 칼을 갈고 있었다. 


나는 갈아야 할 칼은 없었지만 조금 서성이며 

간판을 꼭 닮은 주인의 뒷모습을 조금 더 지켜 보다가 

간식을 고르던 마음은 까맣게 잊고 집으로 돌아왔다.


종이에 간판 하나를 그리고

'칼 갈아' 대신에 '그림 그려'로 바꿔 적어봤다.

"그림 그려 드립니다."


매일 칼 갈 준비를 해놓고 

간판을 거리 앞에 내 놓는 주인처럼,

나도 이 그림 간판을 펼쳐놓고 매일 그림을 그려야지.

손님이 오든 안오든 

그날 그릴 그림을 앞에 두고 

계속 그리는 사람이 되어야지.



단단하고 심플한 마음 하나를 

입간판처럼 펼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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