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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젤 Jan 12. 2022

[문학] 1차원이 되고 싶어 (2021)

그 시절 우리의 맨얼굴들

한 개인은 점이다. 점은 0차원의 세계다. 스스로 알을 깨고 외부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세계는 나와 타자를 잇는 선이 된다. 선은 1차원의 세계다. 


<1차원이 되고 싶어>는 그에 대한 이야기다. 너와 나만이 존재하는 1차원의 세계. 그곳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


"There's more in this egg than you think" / @easel


성장소설을 좋아한다. 유치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어릴 적부터 가장 좋아해 왔던 책 중의 하나는 최근 뮤지컬로 만들어진 유진과 유진이다. 이 책은 좋아하는 친구가 재밌다며 추천하길래 학창 시절의 자전적 이야기라니 성장소설이겠거니, 하고 큰 고민 없이 집어 들었다. 이렇게나 연애소설일 줄은. 결국 사랑과 관계 속에서 고민하며 성장을 이루어내는 이야기이니 성장소설이기도 하려나.




@easel


너와 나를 잇는 선이 1차원인 것은 알겠는데, 그럼 왜 1차원이 '되고 싶어' 일까?


너와 나의 관계(1차원)를 바라보는 다른 시선이 생기면 관계는 면적 안에서 의미를 갖고 다시금 명명된다. 그렇게 선은 평면이 된다(2차원). 누구나 경험해봤을 것이다. 단짝 친구나 연인 관계가 타자화 되어 관찰되면서, 평가의 대상이 되고, 그러면서 관계의 속성이 이전과 달라지는 순간순간을. 관계 밖의 누군가는 관찰자가, 누군가는 경쟁자가 되고, 누가 누구를 왜 좋아한다더라 어떻게 대한다더라 그 이유는 뭐라더라 앞으로는 어떨 것 같더라 뭐 그런 피곤한 얘기들.


관계가 명명되는 것이 좋은, 때로는 그것 - 자랑하기 위한 또는 관계 맺음 자체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 - 자체가 관계의 목적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떠한 관계와 생존에 있어 중요한 의미일 수 있다. 때로는 2차원의 효용이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관계들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소설 속 관계는 2차원의 효용을 따지기 전의 마음을 그리고 있다. 2차원의 효용이 마이너스인 그런 관계.


이 관계는 1차원이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 그러니 '1차원이 되고 싶어'라고 말할 수밖에.


소설 속 나는 윤도를 짝사랑하고, 윤도도 나에게 모종의 애정으로 화답한다. 둘은 1차원의 세계 - 중경삼림과 california dreaming의 세계  - 에서 서로에게 위안을 찾는다. 그러나 윤도는 나와의 관계에 타인의 시선이 느껴지는 순간, 이 관계가 2차원이 될 가능성을 느끼고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다. 둘의 세계, 특히 윤도의 세계 - 축구와 오토바이의 세계 - 에서 둘의 관계는 절대로 면적을 가져서는 안 되니까. 나 또한 그걸 알기 때문에 윤도와 1차원으로 남아있기 위해, 2차원으로 나아가지 않고 1차원에서 이어져있는 실을 부여잡고 애를 쓴다. 2차원 - 학교에서의 시선과 평가 - 은 무서우니까. 그러면서 윤도에게 서운해한다. 나도 태리를 같은 방식으로, 혹은 더 비겁하게 밀쳐내고 있으면서도.


소설 속에서 태리는 나에게 내가 윤도에게 갖는 것과 같은 맥락의 감정을 품고 있다. 태리는 나와의 1차원적 관계를 넘어 적극적으로 2차원에서의 관계를 형성하고자 다. 정확히는, 1차원이든 2차원이든 겁내지 않는다. 너와 나의 선이 있을 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숨 쉴 수 있는 곳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자고 제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태리를 통해 2차원의 무서움을 깨닫는다. 2차원에서도 면적에 제한되지 않는 태리가 밉기도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급기야는 내 세계에서 태리를 없애버린다.


내가 윤도에게 느꼈던 서운함과 원망, 그리움은 윤도가 내가 짊어지고 있지 않은 고민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모두 사라진다. 윤도는 이미, 학교 안에서의 시선을 넘어 학교 밖의 생존을 고민하고 있다는 걸. 개인적으로는 모두 각자의 고민을 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윤도만이 그렇게 압도적으로 이해받아야 할 만한 사정 - 그런 게 어디에 존재하겠냐만은 - 을 가지고 있는지는 사실 모르겠지만, 윤도를 좋아하는 이상 주인공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용서할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애정에서 비롯된 서운함과 증오는, 다시 애정에서 발아한 이해와 측은함으로 씻어 내려. 레드 와인을 화이트 와인으로 닦아 내듯이.


너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나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이 닿아 선이 된 1차원의 세계, 그 순간에 머물러 있고 싶은 마음. 경쟁자와 관찰자를 포함한 다른 누군가가 있는 2차원으로, 또는 관계를 넘어 현실의 벽과 어른들의 사정이 있는 3차원으로는 가고 싶지 않은 마음. 그런 마음으로 내 세계에서 없애버렸던 태리가 잘 살아있다고 시간을 건너 소식을 전해온 그 순간 나에게 태리는 4차원의 인물이 아니었을까.




델리 스파이스, Espresso 앨범 커버, 2003. 1.


소설을 읽다가 우리 동네 얘기 아니야? 싶어 작가의 프로필을 찾아봤다. 그만큼 자전적이다. 상황의 서술도 감정의 묘사도 그 시절의 나 너 그리고 우리를 보는 것만 . 옆 학교 친구가 회상하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듣는 느낌. '학력이 더 나은 삶을 보장해줄 거라는 믿음이 유효하던'  [1] 때, 외고 심화반을 다니고, 키치죠지의 검은 고양이 - 소설에 나오는 노래는 아니지만 너무나 이 즈음의 심상에 딱 맞는 제목의 노래 아닌가 - 를 듣고, 일본 음악이나 인디음악 그리고 일본 패션과 홍대 패션을 흘깃거리고, 버디버디가 아닌 MSN으로 어른들의 문화와 서브컬처 사이의 경계 어딘가에 서서, 약간은 괜히 우쭐해버리는 마음으로 인생과 첫사랑과 우울에 대한 이야기에 푹 빠져 새벽까지 수다를 떨던 그 시절. 남학교는 여학교의, 여학교는 남학교의 어떤 모습에 경악하고 또 궁금해하다가 서로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하던 그 시절.


[1] p. 40.


IMF를 전후로 한 삶의 변화들, 어머니에게 의존하는 아버지와 그로 인해 종교에서 안식과 자아를 찾아 매달리는 어머니들의 모습도 어쩐지 멀지 않은 곳에서 본 것만 같다. IMF 이후 급변하는 사회에서 허영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 이후 회복된 경제의 증명인 것 마냥 모두가 붕 떠있던 2002 월드컵 즈음이라던가, 롤러코스터를 타던 그때의 사회와 사람들의 모습도. 그즈음에 알고 지내던, 부질없는 인생상담과 연애상담을 주고받던 누군가의 일기장 한 권 정도를 훔쳐본 느낌이었다. 아름답게 각색해서 절반의 진실만을 써둔 그런 일기장.


연재되었던 소설에 뒤를 이어 붙여 만든 장편이다 보니 미처 다 설명되지 않은 부분들이나 다소 이음매가 어색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메리제인 슈즈, 빚쟁이와 장미꽃 같은 단서들) 그렇지만 현실만큼이나 소설도 모든 것이 정합적으로 맞아떨어지고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궁금증을 유발하는 그 자체로도 역할을 다한 걸지도 모르겠다. 다소나마 오픈 엔딩이기도 하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태리와 윤도와 무늬와 태란 누나와 나미에 누나를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차원에서 2차원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관계와 이유는 다양하니까.  세계에서 사라져 버린 사람들.


4차원에서 온 태리와 주인공은 어떤 감회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나만의 세계를 벗어나 너와 나로 세계가 개편될 때 특별함을 느끼던 그 순간을 어떻게 돌아보았을까.


그 시절 1차원의 순간들에 대해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기를, 조금은 더 자란 사람으로서 덜 자랐던 그 시절 스스로의 맨얼굴들을 돌아보며 용서와 사랑을 이야기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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