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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달 Sep 02. 2020

머무르는 것들에 대한 발견

벌새, 도약이 아닌 응시를 위한 날갯짓  

  <벌새>에는 희망도 절망도 없다. 지속되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 들면 어느새 성큼 상실이란 녀석이 다가온다. 하지만 빈자리는 또다시 사랑을 이야기하는 자들의 온기로 덥혀지고, 불행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서늘한 기운으로 그 자리를 채간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세상의 간극 속 미묘한 틈새를 메우는 것은 오직 은희의 얼굴뿐이다. 은희는 매 순간 오랫동안 그곳에 머문다.      


영화 <벌새> 스틸컷

  

  중학교 2학년 은희에게 세상은 온갖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있다. 은희의 시선이 머물러있는 1994년의 풍경은 아직 덜 마른 회벽처럼 축축하고 갑갑하다. 등하굣길에서 매일 지나치면서 만나는 재개발 구역이나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린 성수대교는 은희가 내면 깊숙이 느끼고 있던 모든 단절과 맞닿는다. 장사를 하는 부모님은 은희를 제대로 돌봐줄 겨를이 없고 수험생인 오빠는 서슴없이 폭력을 휘두른다. 언니는 밤마다 은희가 있는 방까지 남자 친구를 데려오며, 어제까지만 해도 사랑을 말하던 친구들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등을 돌린다. 유일하게 침착한 언어로 늘 위로의 말을 건네주던 한문 선생님 영지는 성수대교 사고의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영화 속에서 은희의 얼굴은 머무름의 증표다. 은희의 시선에 비친 영지는 언제나 섣불리 말을 꺼내는 법이 없다. 그녀는 은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노래를 불러주면서 정적마저 사유의 흔적으로 만드는 재주를 지녔다. 은희는 그런 영지를 호기심 있게 들여다봄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어렴풋하게 마주해본다. 이따금 일상 속의 부조화도 은희의 표정을 통해 드러난다. 바로 어제까지 전등을 던지며 싸우던 부모님이 다음날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웃는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도둑질을 한 은희를 경찰에 보내겠다는 말에 그러라고 이야기하는 무심한 아버지가 은희의 수술을 앞두고 예기치 못한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선 의외성을 발견한다.  

영화 <벌새> 스틸컷

  

  그리고 은희는 자신에게 벌어지는 이 크고 작은 단절의 과정들을 대충 흘려보내지 않는다. 카메라가 외삼촌이 떠나고 난 다음에도 켜져 있는 고장 난 센서 등을 비추듯, 은희 또한 자신을 훑고 지나간 세상의 흔적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아파트 입구에서 쏟아지는 햇살의 빛을 새삼스럽게 바라보던 엄마는 은희의 부름에도 절대 뒤를 돌아봐주지 않는다. 하지만 은희는 그녀가 카메라의 프레임을 벗어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치지 않고 간곡하게 엄마를 부른다. 이 모습은 맨 처음 신에서 은희가 호응 없는 대문을 발광하듯 두드리는 장면과도, 엔딩에서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운동장에 모인 아이들 사이에 선 은희가 세상을 바라보는 장면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은희는 늘 그 자리에 존재하는 반면 은희의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는 종종 부재한다. 

영화 <벌새> 스틸컷

   그러나 잘못된 번지수 앞에서 대꾸를 기다리고 서있던 오프닝과 다르게 엔딩 속 운동장 위에 서있던 은희의 얼굴 위로는 답변과도 같은 영지 선생님의 편지가 흐른다. 은희는 그렇게 또다시 세상과의 소통이 아닌, 내면에 머물러있는 것들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되새길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이 지점에서 머무름의 의의를 찾는다. 


  세상에서 가장 작지만 날아다니는 힘이 강해 1초에 19-90번의 날갯짓을 하며 공중에 떠있는다는 벌새. 영화 <벌새>는 날기 위해 줄곧 날갯짓을 하는, 이 작은 은희의 머무름에 대한 기록이자 우리 모두가 잠시 한 번은 머물렀던 시간에 대한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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