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 빛나고 사라진 <어느 가족>
가족은 왜 필요할까.
얼마 전 개봉한 한국 영화 <마녀>를 보며 곰곰이 생각했었다. <마녀>의 주인공 자윤(김다미 분)은 폭력성과 잔인함이 극에 달하도록 시스템화 되었고, 어벤저스가 따로 없을 만큼 엄청나게 '쎈' 캐릭터였다. 사람과의 관계는 필요에 의해 맺는 것이었고 , 이를 철저하게 이용할 줄도 아는 영특하기 그지없는 학생이었다. 그런 그녀도 가족(게다가 친부모님도 아니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걸 보며, '지구 뿌실만큼 쎄도 가족은 필요한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가족은 뭘까.
남성인 아버지와 여성인 어머니,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그룹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가족'이라 칭한다. 가끔 그 윗 세대의 어르신이 포함되기도 하고, 요새는 반려동물이 '가족'의 범주 안에 속하는 것 또한 흔해졌다. 우리는, 특히 우리나라는 이 외의 형태를 지닌 그룹을 가족이라 인정하지 않는다. 동성애자는 법적으로 결혼을 할 수 없으며, 배우자가 없는 성인은 아이를 입양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 '평범한'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으로 나뉜다.
하나, 쥬리가 린이 되기 까지.
오사무(릴리 프랭키 분)와 쇼타(죠 카이리 분)는 마트에서 필요한 물건을 훔친 후, 고로케를 먹으며 다정히 집으로 향한다. 그러던 도중, 집 밖에서 굶주린 아이 '쥬리'(사사키 미유 분)를 발견했고, 마치 뭔가에 홀린 듯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다.
집에는 전 남편의 연금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노파 하츠에(키키 키린 분)와 아내 노부요(안도 사쿠라 분), 노파의 손녀 아키(마츠오카 마유 분)가 한창 저녁을 먹고 있다. 그들 중 '혈연'으로 얽힌 사람은 아무도 없다. 쇼타 역시 린과 마찬가지로 오사무와 노부요가 어디선가 주워온 아이였고, 아키는 하츠에의 전남편과 다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의 딸이다.
쥬리에게 밥을 먹이고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려던 찰나, 노부요와 오사무는 아이의 집에서 들려오는 절규 소리에, 쥬리를 다시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온다.
"나도 낳고 싶어서 낳은 게 아니야!"
몸에는 상처가 가득하고, 쉬가 마렵다는 소리를 못해 이불을 적시던 쥬리는 오사무네 가족의 품 안에서 '린'이 된다. 오빠인 쇼타를 열심히 따라 뛰어다니고, 짧아진 자신의 머리를 보며 '귀엽다'라고 좋아하고, 파란색보단 노란색 수영복이 좋다는 이야기도 할 줄 아는 '어느 평범한 소녀'처럼 자란다. 사실 오사무네 가족은 '어느 평범한 가족'이 아님에도 말이다.
<어느 가족>의 원제는 '만비키 가족(万引き家族)'. 도둑 가족, 혹은 훔친 가족이라는 뜻이다. 함께 영화를 본 친구는 원제가 의역된 것을 아쉬워했지만, 나는 왠지 <어느 가족>이 더 마음에 든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 역시 어디선가 살고 있을 어느 가족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둘, 아이들이 당신을 뭐라고 부르던가요.
하지만 '어느 평범한 가족'이 아니었기에 결국 그들은 헤어진다. 린은 다시 쥬리의 자리로 돌아갔고, 그들의 보금자리엔 폴리스 라인이 쳐졌다.
유괴를 비롯한 혐의로 취조를 받는 도중 노부요는 아이들이 당신을 뭐라고 불렀냐는 질문을 받는다. 취조관은 그들의 엄마였음을 의심치 않아하는 그녀에게 냉정하게 묻는다.
"아이들이 당신을 엄마라고 부르던가요?"
노부요는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 '엄마'와 '아빠'라는 호칭은 무슨 의미였을까. 쇼타에게서 '아빠'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했던 오사무와, 린이 '엄마'라고 부르면 어떨 거 같냐는 질문을 받은 노부요의 표정. 그리고 작품의 말미에서야 나지막이 '아빠'라고 속삭이는 쇼타의 모습을 함께 곱씹으면, 그 답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쇼타에게도, 린에게도. '아빠'와 '엄마'는, '어느 평범한 아빠'와 '어느 평범한 엄마'의 의미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을 어디서 낳아왔냐며 엄마를 때리는 아빠와 예쁜 옷을 사주는 날이면 자기를 때리던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린. 그리고 추운 겨울 차 안에서 혼자 울고 있어야만 했던 쇼티. 그 아이들이 또다시 누군가를 '엄마' 그리고 '아빠'라 부르기 위해서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사랑한다면 때리지 않고 이렇게 안아주는 거라는 사실을 오사무네 집에 와서야 알게 된 린에게, '엄마'란 존재는 따듯한 사람이 아니었을 테니까.
'엄마'와 '아빠'가 따듯하고 아름다운 존재임을 깨닫기 전까지, 아이들은 단지 노부요를 '엄마'라, 오사무를 '아빠'라 부를 수 없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작품의 명장면은 단연 불꽃놀이 소리를 듣고 마당으로 나온 가족들의 모습이다.
지붕을 향해 고개를 빼든 아이들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오사무는 그냥 소리만 들으라고 한다. 불꽃놀이로 인해 환하게 밝혀진 주택단지의 모습과 어둡기만 한 오사무네 집의 극명한 대조, 그리고 소리로 불꽃을 추측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상황은 제도권의 세계와 멀리 떨어져 있는 처지를 암시한다.
제도권에 속하지 않았기에 훔쳐서 이루어야만 했던 어느 가족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제도권이라는 것이 어디서 터지는지 모르는 불꽃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 고레에다 히로카드 감독은 아역 디렉팅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으며, <어느 가족>은 그가 안간힘을 써서 집대성해낸 가족론임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황금종려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