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생 4회 차, <베일리 어게인>
지난 삶에 대한 기억을 갖고 다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건 축복일까.
‘견생 4회 차’라는 카피를 내세운 <베일리 어게인>은 환생을 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개’의 이야기이다. ‘개’의 입장에서 인간들의 행동을 해석하고, 삶의 이유를 찾아가는 작품이다.
4번의 환생을 거치는 동안 주인공 베일리는 다시 태어날 삶에 대해 어떠한 선택도 할 수가 없다. 단지, 이든과 함께 했던 한 번의 행복한 삶이 다시 반복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사실 우리는 누구도 삶의 시작을 선택할 수 없다.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갈지, 어떠한 부모를 만나게 될지, 언제 어디서 태어날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기에, 내게 주어진 어떠한 것이든 ‘운명’이라 칭하며 그 순간들을 받아들이고 (혹은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살아간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일까.
이든과 헤어지고 몇 번의 생을 반복하는 동안 베일리는 이든과의 재회를 염원했다. 하지만 ‘앨리’로, ‘티노’로, 심지어 이름 없는 ‘개’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 삶에 최선을 다했다. 이별의 상처로 식어버린 ‘카를로스’(앨리의 견주)의 인생에 온기를 채웠고, 집 밖에선 한없이 작아졌던 마야(티노의 견주)를 바깥세상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이든과 헤어진 후 두 번의 견생을 잘 살아낸 베일리에게, 마지막 4번째 견생이 찾아왔다. 그리고 마치 지난 고군분투에 대한 보답처럼 이든과의 재회도 이뤄졌다. 그리고 베일리는 ‘지금을 즐겁게 살아가라’는 고무적인 멘트를 남긴다.
사실 베일리는 이든과의 기억 덕분에 몇 번의 견생을 잘 살아냈는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커다란 목표 혹은 기억이 누군가의 인생의 지표나 지침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차피 주어진 운명이라면 그 안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극히 드물지도 모른다. 하지만 <베일리 어게인>은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돌려 말하지 않는다. 뻔한 이야기를 하지만, ‘하긴 뻔한 이야긴데 뭐 어쩌겠어.’ 싶다.
길거리에서 강아지를 마주치면 쉽게 스쳐 지나가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혹은 조금은 명약관화하더라도 고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은 누군가에겐 추천해봄직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