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 : 시간이 주는 마법
"압생트 있잖아. 프랑스 예술가들이 마셨다는 그 초록병 화학주 - 고흐도 사랑했다는 그 술,
사람들을 병들게 만든다고 프랑스에서 금지시켰잖아.
난 가끔 생각해. 우리나라 참이슬도 금지시켜야 한다고"
"근데 이 녹색병만의 감성이 있지않아? 한국영화를 본 외국인들이 이 녹색 병의 참이슬을 보고, 봉준호 영화에서 그 여자가 마시고는 비밀을 털어놓는 술이 이 술이냐고 좋아한다던데, 그 마법의 초록 병"
"럼, 보드카, 데킬라 보다 알콜도수 낮아서 스트레이트로 마셔도 좋고, 하이볼로 마셔도 좋고 소주만큼 좋은 술이 어디있냐? 신동엽도 인생에서 가장 마지막 순간에 마실 술은 소주라고 얘기하더라.
뭐 비싸고 향이 좋은 고급술도 있지만 내 인생을 함께 이야기하는 술은 젊은 시절의 고통을 함께했던 싸고 쓴맛의 소주인거지"
"그래. 해외로 나가면 젤 그리운게 좁고 지저분한 삼겹살집에 모여서 소주 마시던 기억이라더라. 우리 형이 미국에 있잖아. 금요일 조기퇴근하고 해피아워때 직장동료가 참이슬 chamisul 표기를 보고 케미슬이라 발음하는걸 보고 술맛이 확 떨어졌다고."
"그래서 혜린아, 이번에 나가면 언제 들어오는거야?
혜린이 미국으로 떠나기전, 모인 친구들은 기분좋게 술을 마시며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정장을 차려입은 민호는 신부대기실로 들어가 하얀 웨딩드레스 입고 소파에 앉아있는 혜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빛이 반짝반짝 나는 신부는 그 어느때보다 아름다웠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민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민상담 비슷한 통화를 여러차례 하고 난 뒤 둘은 부쩍 가까워져 주말을 함께 보내곤 했다.
혜린이 엄마로부터 독립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을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민호는 옆에서 줄곧 함께 했다. 회사 주변에 있는 원룸을 같이 보러 다녔고 소소한 자취꿀팁을 공유해주었다.
혼자서 아무것도 결정을 해 본적이 없던 혜린은 민호의 조언을 아주 진지하게 들었다.
원룸 계약을 이틀 앞둔 날, 혜린은 민호에게 엄마가 함께 갈테니 동행해 줄 필요가 없다고 연락을 했다. 민호는 그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참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호주에 있던 남자친구에게 연락이 왔고 혜린은 자립보다 결혼을 택했다는 사실을 듣고 멍하니 있었다.
원룸가계약을 취소하면서, 민호와 함께한 시간도 몽땅 없던 일로 만들어 버렸다. 함께 웃었던 기억들이 모조리 민호에게만 있던 일이 되었다.
한 여자에게 두번 차였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났지만 성급한 구애나 고백은 안했으니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민호도 지낼 수 있겠다 싶다. 비밀스러운 시간들이 달콤했던 이유는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꽃향기도 오래 머무를 수 없듯이 잔향만 남았다.
친구사이에 그 정도 도움은 줄 수 있는 거니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사실 축하해주러 와야할지 좀 고민했었다."
혜린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그래도 와줘서 고마워. 내 고민들 들어줘서 진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 너만 생각하고 잘 살아라. 내가 할말은 이것밖에 없네."
"......"
어색할 틈도 없이 신랑과 카메라맨이 신부대기실로 들어오며, 앨범 촬영이 있으니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다.
민호는 남편과 눈인사를 나누고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혜린의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그 남자는 같은 동네에서 자라 부모들도 아는 사이였고, 오늘의 결혼은 당연한 순서라는 둥 하객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혜린과 남친은 계속 만나다가 서로 시간을 가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언뜻 술자리에서 함께 이야기하던 중에 혜린이 화를 내듯 하던 말이 생각이 났다.
"용기를 못 내고 왜 알콜의 힘을 빌려서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하냐고, 책임감이 없는거지"
민호는 피로연 테이블에 앉아서 과일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와인을 연거푸 들이키며,
'내가 만약 용기를 냈다면 달라졌을까' 곱씹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게 결론이 날 일이었다.
둘은 함께 지켜본 시간이 훨씬 많았고, 그 시간만큼 더 믿을수 있는 가깝고 든든한 계단이었을게다.
뒤늦게 도착한 준서가 가까이 다가와서 말은 건다.
"낮부터 왜이렇게 마셨냐?"
"제정신으로 버티기에는 싱글로 남은 이 세상이 너무 가혹하네."
민호는 와인잔을 천천히 비웠다. 향을 음미하며
"보들레르가 그랬지.
취하라,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하여 당신을 땅쪽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