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시는 이유 - 10

추억이 그립다면

by 소설

샤워를 하고 나온 수빈은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을 확인한다.

'부재중 전화 2 - 민호'.

무슨 일일까, 침대에 걸터앉아 잠시 망설이다가 수빈은 통화버튼을 꾹 누른다.

"응. 전화를 못 받았네."

"수빈아, 잘 지내지? 진짜 오랜만이네"

"응. 무슨 일 있어? "

"혜린이가 한국 들어왔다고 너한테 연락해 줄 수 있냐고 묻더라"

"아, 그렇구나."

"혜린이 연락처를 너한테 알려줄까?"

"흐음, 그래. 내가 연락해 볼게"


호텔 로비로 들어서며 수빈은 역시 스니커즈를 신고 나오길 잘했다며 걸음에 더 여유를 부렸다.

밤새 스커트와 구두, 셔츠의 조합을 머릿속으로 반복해서 굴려보았지만,

결국 매일 입는 슬랙스에 편안한 카디건을 걸쳤다.

평소와 다르게 불편한 복장을 골라입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후회할 나이는 이미 지났다고 느끼며.

더 라이브러리 안쪽으로 들어가 테이블을 둘러보아도 익숙한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통창 가까이 다가가 편안한 소파와 창 밖이 보이게 사진을 찍고 톡방에 남긴다.

'나 창가자리에 앉음'

변한 모습을 못 알아보면 어쩌나 셀카를 찍어 보낼려다 참는다.

이제는 필터를 써도 셀카가 만족스럽지가 않다.

'알아서 찾겠지'

자세를 고쳐앉아서 팔짱을 끼고는 테이블의 메뉴와 가격대를 확인해본다.

테이블 옆으로 갈색 드라이빙 로퍼에 차분한 배색의 스커트가 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들어보니 생글생글 웃고있는 갈색 웨이브머리의 혜린이 서있다.

"수빈아, 오랜만이야"

"세상에, 혜린아. 그대로 예쁘네. 언제 한국 들어온거야? 얼른 앉아봐"

"못알아 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자세를 보니 딱 너더라."


10년의 공백을 지나 서로 어색한 표정으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 결혼, 직장, 거주지의 근황 체크로 괜히 더 부산을 떨며 이야기하다가 끝나지 않는 육아 에피소드.

"지나가는 강아지 이름을 정해줘야 하는데 맘에 드는 이름으로 인사를 해야 그 자리를 이동할 수가 있는거야. 길목에서서 15분을 기다리는데 정말 미치는줄 알았다니까"

"하하하하 남의 애기 이야기는 진짜 귀여워, 엄마는 속이 터지지만"

무슨 이야기라도 계속 쏟아내야 하는 이유는 둘 다 긴장한 탓이리라.

옛 이야기와 따뜻한 눈빛에 한참이나 목말랐는지도 모르다.

말끝마다 "그대로네", "맞아 맞아"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잠시 애매한 침묵,

수많은 생각이 머릿 속을 스치지만 한층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혜린이 웃는다.

"진짜 신기하다.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수빈아, 너무 보고싶었어"

수빈은 순간, 따뜻한 눈빛으로 마음을 전하는 모습에 가슴 한켠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느꼈다.

시간은 흘렀는데, 어떤 감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저 모습에 내가 안도하고, 무장해제되고, 마음을 쓰고, 무작정 잘 해주고 싶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얕은 감정의 물결이 신선하다.


"미안미안. 첫째 딸 학원 라이드하고 겨우 나왔다.

둘이 얘기 좀 나눴어? 시간 주려고 일부러 천천히 온거 알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는 민호 역시 변한듯 그대로인듯한 모습으로 멋쩍게 걸어온다.

"어머 민호야, 우리는 한국에 있는데도 얼굴을 못 봤네"

"그러게, 아직 음식도 안시키고 뭐야?

낮술 마실거지? 이런 날 마셔야지. 램 먹을까? 관자는? "

민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린의 기억 속에서 오래된 여름 오후가 펼쳐졌다.

— 그날, 민호는 그 특유의 웃음으로 잔을 내밀었다.

향을 음미하며 꼬냑에 천천히 입술을 댄다.

"그때 우리 부산 여행 같이 갔었잖아. 준서가 배를 한척 사야겠다고. 하하."

세사람의 젊음이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준서를 못 봐서 아쉽네. 다음에 볼 수 있겠지."


수빈이 먼저 자리를 뜨고, 혜린과 민호는 함께 수빈을 배웅하며 정원으로 나와 걷는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 못해본 것 같다. 미국에서도 잘 지냈지?"

"응. 잘 지냈지. 아기 키우고 적응하느라고 혼을 쏙 뺀 걸 제외하면.

민호 너는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의 스멜이 나는데."

"당연하지"

"민호야, 우리가 아마 리듬이 조금 달랐었겠지?"

"어릴때였으니까, 내가 많이 서툴었고. 하하 "

"진짜 한번씩, 아마 몇년에 한번 네가 꿈에 나올 때가 있어. 한 두어번 정도?

꿈에서 깨고 나면 너무 행복한거야.

나를 참 아껴주던 사람이 있었지, 하고 참 감사해했어.

너라는 사람과 좋은 인연이었다는 거.

좋은 사람의 기억이 전혀 퇴색되지 않아서 오히려 소중하구나 싶어"

"나는 나쁜년으로 기억을 저장해뒀는데 너는 참 편하구나. 하하

헤어지기 전에 악수 한번 하자"

"그래, 꿈속에서도 넌 이렇게 웃고 있었어"

"잘 지내는거 같아서 고맙네"


혜린은 대답 대신 고개를 기울이며 걸음을 걸었다.

바람 결속에서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그 안에 오래된 마음 하나가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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